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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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2년 호남 지방을 연고로 창단돼 2001년 7월 3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KBO 리그 소속 구단. 홈경기를 치르는 핵심 연고지는 광주광역시였고,[7] 1989년까지는 광역 연고권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했다. 팀의 상징 동물은 호랑이다.
대략 이 구단은 프로야구 창설 후 처음 20년간의 반, 즉 1982년 원년부터 2001년 KIA로 바뀌기 전까지 무려 9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9번이나 우승했으니[8] 이 팀을 전설이라 불러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당시의 야구 화두는 우승팀이 해태인가, 아닌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2년부터 2001년 7월 31일까지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명으로 있다가 기아자동차가 인수한 후 2001년 8월 1일부터 KIA 타이거즈로 전환되었다.
2. 연혁
2.1. 창단 및 프로 원년 (1981~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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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 출신인 기업 내지는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 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10] 창단된 팀. KBO 쪽에서 호남 연고로 접근한, 당시 호남 출신 창업주의 전라도 기반 3대 대기업이었던 삼양사, 금호고속,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에서 모조리 거부당하자[11][12] 정말 궁여지책으로 호남과 연관 관계가 있는 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수준이었던 해태제과가 선정된 것이다. 그만큼 '''호남 연고 대기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태의 참여가 확정되기 전 광주일보의 김종태 사장은 만에 하나 해태가 단독으로 창단할 능력이 없다면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경우처럼 전라도민들의 공모 주를 모아 도민 구단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에 지역감정이 심화될까봐 지역연고제를 반대했던 청와대가 그것을 허락해 주었지만, 다른 지역에 하나씩 야구단이 생기는데 호남만 비어있다면 소외론이 나올수도 있고, 호남지역민의 정치관심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꼭 팀이 필요했던 것이다.
1981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서 프로야구 창립 과정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프로야구 창립 과정에서 호남 연고팀을 맡기로 지명된 기업은 호남 최대의 기업인 금호그룹이었다. 당시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금호실업 사장[13] 이 프로야구 참여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밝히고 부친이자 그룹 회장인 박인천 회장에게 건의를 하기로 했었는데 부친이 고령에 병환이 있어서[14] 말을 못하고 있다가 뉴스를 통해 박인천 회장이 금호의 프로야구 참여 소식을 알고 화들짝 놀라게 됐다. 프로야구 창립을 주도하던 인물 중 하나인 이상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말에 의하면 보도가 나간 뒤 박성용[15] 금호그룹 부회장이 청와대로 찾아와 금호가 호남 프로야구단 담당 기업으로 지명된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뜻이냐고 물었고 이상주 수석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성용 부회장이 "그러면 우린 빼달라"고 말해서 사실상 금호의 참여는 물건너 갔다. 프로야구 참여 거부가 박성용 부회장 본인의 뜻인지[16] 박인천 회장의 뜻인지 둘 다 같은 생각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설로는 창업주의 상의 없이 아들들이 멋대로 정한 일에 분통을 터뜨려서[17] 불발되었다고 하나 단순히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현대, 럭키금성, 대우그룹, 선경 같은 최상위권 재벌은 참여하지 않고[18][19][20] 롯데,[21] 삼미, 해태 등이 선정되자 '''삼성은 이런 피래미들과 같이 못 놀겠다'''고 창단을 포기하려는 걸 억지로 주저앉혔다고 한다.[22][23][24] 해태가 프로야구에 참여한 건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다. 롯데는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에 '경쟁 대상인 같은 업종은 가급적 피한다' 라고 써있는데 왜 해태가 들어오냐며 반대를 했다. 급기야 참여 안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에 의하면 롯데 신격호 회장이 부산 대신 서울을 연고지로 얻어내려고 강하게 나가기로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한다. 해태를 반대하던 롯데는 결국 추진위원회를 못이기고 부산을 연고로 정했다. 호남 연고가 붕 뜬 상황에서 박건배 회장이 참여의사를 표력하여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해태는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할 권리를 약속받는다.[25]
우여곡절 끝에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타이거즈는 절대적인 선수 숫자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5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실업야구 시절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대성공을 거둔 김동엽 감독은 자신감에 넘쳤다. 선수는 15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해태는 1982년 내내 선수부족으로 고전했다. 창단당시 해태 엔트리에는 투수로 등록된 선수는 딱 5명. 그중에도 이상윤과 방수원, 최영조는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중퇴한 선수로 대학중퇴자는 선수로 뛸수 없는 KBO 규정상 선수 자격에 문제의 소지가 발생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투수 3명으로 시즌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창단식을 강행한 셈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프로팀 입단을 주저하며 혹은 연고지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며 실업무대에 남아 있던 선수들 중에 서울 출신의 김경훈[26] 과 대전 출신의 홍순만을 각각 원래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MBC청룡과 OB베어스 측에 양해를 얻어 충원했고 시즌 개막 직전 역시 서울 출신인 조충열을 급히 데려오게 된다.
전국을 여섯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구단이 각자의 연고지출신 선수들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선발 할 수 있게 했던 것이 프로 원년의 규정이었다. 하지만 그 출신의 기준은 본적지나 출생지가 아니라 졸업한 고등학교로 설정 되어 있었고 따라서 해태타이거스가 뽑을 수 있는 선수는 광주와 전남 북 지역 고등학교 졸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안에 그럴만한 학교가 당시로서는 군산상고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었다.
호남 출신의 선수라고 하더라도 고등학교는 서울이나 다른지역으로 옮겨 가서 졸업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기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호남지역의 고등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49년 청룡기 대회에서 김양중이 이끌던 광주서중 이후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의 군산상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호남야구의 붐을 타고 그 뒤를 이은 것은 1975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일고와 1977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상고였다.[27]
1975년과 1977년이 되어서야 전국무대에서 우승 다툴만큼 경쟁력이 갖추게 된 호남지역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프로무대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면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야구선수들에게도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될 서른 안팎의 나이부터 직장생활의 무기가 되어줄 학벌을 챙기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특기생으로 대학으로 부터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을 만한 실력이 갖춘 선수들의 경우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다. 그리고 특별히 국제대회에 우승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병역특례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운동선수들도 평범한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재학 중에 혹은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육해공군이 각각 운영하는 야구팀으로 입대해 병역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기 때문이다.
시즌 개막이 된 뒤에도, 마산 출신의 임정면과 1982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결성한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무단이탈한 김일권을 우여곡절 끝에 영입하여 간신히 21명의 선수단을 구성할수 있었다. 김일권은 그 해 53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했다. 또한 약속대로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불과 13경기를 치렀을 때 조창수와 유남호 두 코치가 감독의 폭력적인 행동 등을 문제삼으며 팀을 이탈하는 사건이 터졌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자존심이 상한 김동엽 감독은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기고 곧장 스스로 옷을 벗고 팀을 떠나버리고, 조창수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었다. 한 팀이 선수 9명만으로 한 경기를 치른 사례(그러려면 지명타자가 없어야 하고 선수교체도 없어야 한다)는 한국프로야구에서 딱 두 번 있었으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28]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참고로 김성한의 1982년 성적은 투수로서는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였는데 다승과 방어율은 팀내 1위였다. 타자로서는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 도루 10개였다. 둘 중 하나에 더 전념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29]
선수층은 양적 기준으로 타 팀보다 허약해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선수 개개인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투수에 김용남, 이상윤은 국가대표 출신에 강만식, 방수원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이름 좀 날리던 투수였다. 야수 중에서도 김봉연은 실업야구계를 평정하던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원년 연봉 1위였고[32]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에 뒤늦게 합류하는 김일권도 국가대표로 잘 뽑히던 선수였기 때문. 한 마디로 '''소수정예'''로 원년리그를 보낸 셈이다. 이름과 달리 스타선수 하나 없다고 감독이 푸념할 정도로 약체였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더 얇은''' 선수층으로도 어째서 4위를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2. 김응용 시대의 개막과 첫 우승 (1983~1985)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제 5편 왕조(2020.02.13) 이 문서를 보면서 같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19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34] 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4,800만원의 계약금과 연봉을 합친 금액에 부대조건으로 승용차 한대를 받고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를 필두로 한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과 동국대 감독으로 있던 김인식을 추가 영입해 코칭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1983년부터 재일동포를 비롯해 해외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에 대한 영입이 시작되었는데 해태 구단은 영입작업에 진통이 있었다. 가장 먼저 점찍은 것은 멕시코에서 뛰고 있던 이원국이었지만 결국 계약금과 연봉에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것이다. 계약금과 연봉 을 합해 7,400만원 그리고 15승을 넘을 경우 2천만원의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원국이 요구한 것은 기본 1억 2천만원에 20승을 넘기거나 평균자책점 2.0이하의 성적을 낼 경우 추가로 1500만원 씩의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나이가 많아 얼마나 오래 선수생활을 할지 모르는 선수에게 그렇게 큰 돈을 쓸수 없다며 영입을 최종적 으로 포기한다. 대신 잡은 선수는 주동식이였다. 나이는 이원국보다 한살많고 장명부보다 기록이 한참 쳐졌지만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7천만원만 투자하면 부담없는 선택이라는 매력이 있었다. 1억 4천 5백만원으로 삼미로 간 장명부의 절반도 안되는 액수였다.
물론 1982년 실업야구 최우수 신인 투수상을 받은 박동경과 최우수 신인 타자상을 받은 양승호에게 계약금과 연봉 각 1200만원을 주고 영입한 것을 비롯해 원년에는 단 한명도 없었던 왼손타자 송일섭과 김일환을 영입하는 등 10명의 선수들을 충원하긴 했다. 하지만 국가대표와 해외파에서 눈에 띌 만한 재목을 끌어오지 못한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는 누가 보기에도 초라했고 사실상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지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1983년 들어 해태는 시즌 전 하위권 전력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부임 첫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차로 뒤진 가운데 6월7일 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 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김응용 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감독과는 정반대로 팀훈련 외 시간 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1983년 6월 25일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응룡 감독은 "프로 선수에겐 결점 보완의 처방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훈련은 각자가 하는 거지요"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원년과 달리 막강해진 마운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상윤이 20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거기다 일본 프로야구 2군 출신의 김무종의 포수로서 당시 국내의 어떤 선수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고 지능적인 투수리드를 선보이면서 투수력의 전반적인 향상을 이끌어 냈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타선의 힘은 한충 강해져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윘다.
투타가 완벽하게 조화가 이룬 해태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따낸 이상윤과 5경기 8타점을 기록한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김봉연의 활약으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일축하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35]
이후 1984년은 연봉처우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서 악재로 작용되 종합순위 5위에 그쳤고 1985년은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공백으로 투수력에 애를 먹으면서 종합 3위에 머물게 된다.[36]
2.3. 막강한 왕조 (1986~1997)
1986년부터는 해태 왕조가 본격적으로 막을 연 시즌이다.
이때 해태는 팀 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내부적으로 코칭스태프에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 재일교포 박정일 코치 를 영입했고 OB와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를 라인업에 더하게 되었다. 1986년은 해태에 우수한 신인 선수들이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다. 광주일고와 건국대를 거친 차동철과 까치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등이 이 시즌에 한꺼번에 팀에 합류했다. 이전까지 고질적인 선수부족에 시달렸던 해태 입장에서 좋은 선수들의 대거 가세는 천군만마를 얻은것과 같았다.
실제로 차동철은 데뷔 첫해 10승을 따내며 마운드에 큰 힘이 됐고 김정수는 정규시즌 9승에 그쳤지만 한국시리즈 3승을 혼자 쓸어 담으며 시리즈 MVP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2년차에 접어든 선동열이 24승, 0.99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며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부상에 신음하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10승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해 해태 마운드의 시즌 팀 평균 자책은 2.86으로 투수진 전체가 에이스급 성적을 낸 것과 다름없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둘뿐인 대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1986년 시즌 우승에는 그 해 변경된 규정의 덕을 좀 봤다. 전해 시즌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를 전부 싹쓸이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 시키는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흥행 참패를 하자 KBO는 전후기 모두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후기 모두 2위를 한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 1위인 OB 베어스는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당시 후기리그가 끝난 후 해태와 OB는 동률로 공동 1위였다. 그런데 당시는 동률인 경우 3전 2선승제로 순위결정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고, 포스트시즌 대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후기리그 우승결정전을 치렀다.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 전후기 통합성적은 70승 1무 37패를 마크한 삼성이 1위, 67승 4무 37패를 기록한 해태가 2위였지만 이 규정 때문에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해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삼성과 OB는 플레이오프 끝에 삼성이 이기고 체력을 비축해 놓은 해태가 그 삼성을 잡고 통산 2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1986~89 시즌 해태의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보면(괄호 안은 통합 승률 순위)
1986 시즌 67승 4무 37패 .644(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70승 1무 37패 .654)
1987 시즌 55승 3무 48패 .532(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64승 44패 .593)
1988 시즌 68승 2무 38패 .642(1위)
1989 시즌 65승 4무 51패 .558(2위) (1위: 빙그레 이글스 71승 3무 46패 .604)
즉 16승 투수 둘(선동열, 이상윤), 30홈런(김성한), 26홈런(장채근)으로 56홈런을 합작한 슬러거를 앞세운, 팀타율도 .283으로 압도적이었던 1988년만 절대적으로 리그를 지배했을 뿐 나머지 시즌에서 해태는 강팀 수준일 뿐 리그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1986 시즌엔 전, 후기 규정이 있는데다 투타를 보면 삼성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율, 실점은 비슷했으며 타율은 삼성이 무려 1푼5리나 앞섰지만 홈런은 해태가 훨신 많은 수준(25개 차이), 말 그대로 단일시즌으로 시즌을 치렀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거기다 대 삼성전에서 11승 1무 6패로 다소 강했다는 점이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향후 두팀의 운명을 가른 명승부였다.
삼성은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김성래가 7회 홈런을 쳐내며 2대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해태타선은 삼성에이스 김시진이 등판한 8회 뒤늦게 폭발했다. 8회말 김봉연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뒤 1대3으로 뒤진 9회말에 김일권의 1타점 3루타와 만루에서 나온 김성한의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11회 말 2사 2루에서 김성한의 끝내기 중전안타가 터지면서 4시간 9분 간의 혈투가 끝이났다. 삼성으로서는 에이스 김시진믈 투입하고도 당한 패배라서 아픔이 두배였다.
하지만 1987년의 경우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1987년의 삼성은 팀타율 3할을 기록했으며 23승의 다승왕 김시진까지 건재한, 말 그대로 그 다음해의 해태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팀이었다. 해태는 2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치고받는 수준에다 주전의 줄부진 내지는 부상 때문에 팀타율 .252의 빈타까지 겹쳤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나 4승 무패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고비때마다 홈런을 터뜨린 김준환이 시리즈 MVP가 됐다. 명실상부한 "왕조"를 세우는 해가 되었다.
이렇듯 정규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보다 8승을 더 거두고도 한국시리즈조차 나가지 못한 1984년의 OB 베어스, 1986년에도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한 OB 베어스, 통합우승을 거두고도 해태 타이거즈에게 작살난 1987의 삼성 라이온즈가 겹치며 1989년부터는 아예 전ㆍ후기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단일시즌의 체제로 나가게 된다.
1988~1989년에는 상대가 삼성 대신 빙그레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1988년 문희수가 눈부신 호투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89년에는 박철우가 맹타를 휘둘려 각각 시리즈 MVP에 올랐다.
1989년은 빙그레 이글스보다 사실상의 전력은 조금 약해보였다. 물론 기존의 선동열에 이강철, 조계현이 가세한 투수진은 이상군, 한희민의 빙그레와도 막상막하였지만 타선이 그해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최초로 20-20을 달성한 김성한, 이 해 제2의 코끼리로 등극하며 .318을 찍은 박철우 이외에는 믿을만한 타자가 별로 없었다. 반면 빙그레는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에 말년의 유승안마저 타점왕에 홈런 2위를 달성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절정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4승 1패로 빙그레를 압도하면서 4연패를 이뤄내고 만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열, 이상윤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방수원[37] , 신동수, 김정수 등이 중심인 불펜진,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용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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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연패로 물러나며 한 해를 쉰 해태는 1991, 1993, 1996, 19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마운드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야수진에는 이종범과 이호성, 홍현우, 장성호가 등장하여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의 뒤를 이었다. 1996년과 1997년의 한국시리즈 2연패는 선동열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해 '해태도 한물 갔다'는 평을 뒤엎고 나온 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선동열과 김성한이 해태타이거즈 유니폼을 벗었다. 선동열은 선수로써 김성한은 코치연수생으로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던 것이다. 그러자 당연히도 1993년 이후 두해 연속 4위권에 머물머 부진했던 해태 타이거즈를 향한 우려의 시선은 한층 깊어졌다. 확실히 뒷걸음치는 것으로 보이던 해태 전력에서 80년대와 90년대 전반부를 통틀어 해태 타이거즈 투수와 타자를 상징했던 두 사람의 이름까지 빼고 보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하위권으로 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보였다.
해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야구 전문가들을 설문해 시즌 판도를 예상하던 언론들은 1996년 봄 2강, 4중, 2약의 전망을 내놓았다. 2강은 현대와 롯데 4중은 LG, OB, 삼성, 한화 그리고 2약은 해태와 쌍방울이였다. 1996년에는 두명의 걸출한 신인들이 입단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92년에 일찌감치 1차 지명으로 찍어 놓았던 국가대표 외야수 박재홍이 연세대를 졸업하는 해였고 그해 1차로 지명한 계명대 출신의 오른손 정통파 투수 김동호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두명의 선수들을 모두 입단시키는데 실패하게 되는데 그 해 헌대그룹이 제2의 프로야구 리그 창설을 염두에 두고 현대 피닉스라는 공룡실업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대 피닉스는 무시무시한 자금력을 동원해 그해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던 선수들을 훓어갔고 박재홍과 김동호 역시 각각 4억 3천만원과 1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진작 피닉스 입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연고지 출신 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세명씩 지명할 수 있게 했던 고졸 우선지명에서 골라냈던 세명의 선수들 중에서도 서재응과 김상훈 두 명이 대학을 택했던 것이다. 기둥 두개를 들어냈지만 새로 쓸 재목은 아직 베지 못한 형국. 타이거즈가 그렇게 앞뒤로 막히고 몰린 상황에서 맞이한 것이 1996년과 1997년이었다.
김성한이 빠진 팀에서 구심점 역활을 하던것은 이순철이었다. 이순철은 김봉연과 김성한을 잇는 타이거즈 선수단 리더였고 1986년 선동열과 함께 입단해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데 이어 세 차례나 도루왕에 올랐던,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비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 대 선수이기도 했다. 해태 왕조시대를 이끌어간 또 한명의 주역이었던 그는 그 무렵 후배 선수들에게 '''선동열, 김성한이 없다고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허깨비가 된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순철의 그런 비장한 훈시를 듣고서야 비로소 화들짝 정신을 차렸노라고 회상하는 후배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이미 그것은 이순철의 생각이기 이전에 모든 선수들의 생각이었고 동시에 그렇게까지 혈압 올리며 정신을 집중해야 할 만금 버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 1996년 그리고 이듬해인 1997년 해태 타이거즈는 야구계 안팎의 예상을 깨고 연속 우승을 달성했고 팀의 우승횟수는 9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해 김성한과 선동열의 공백을 메워준 젊은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타이거즈가 배출한 선동열과 김성한 못지않게 충격적인 선수였다. 그는 프로팀에 입단하기 전 부터 아마추어 야구를 평정한 국가대표 유격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단 젓해엿던 1993년에도 신인왕 경쟁에서는 0.341의 타율에 23개의 홈런을 날리며 프로야구사에서 처음으로 괴물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삼성의 양준혁에 밀리긴 했지만 0.280의 타율에 16개의 홈런 73개의 도루를 기록한데 이어 한국시리즈 MVP 까지 휩쓸며 아마추어 시절의 기대를 넘어서는 활약을 보이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진 것은 2년차였던 1994년이었다.그 해 이종범은 무려 196개의 안타와 19개의 홈런을 쳐내며 .393의 타율을 기록했고 동시에 도루를 84개나 성공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 시즌 최다 도루 부분에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통산 최다기록이며[38] 타율 역시 원년 백인천에 이은 역대 두번째 고타율이었다. 19개의 홈런도 그해 홈런왕 김기태의 25개에 6개가 뒤지는 것이긴 하지만 경이로운 수준의 타율과 도루를 기록한 타자가 동시에 만들어낸 수치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충격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어진 세 시즌동안 3할 3푼대의 타율과 60개 안팎의 도루를 유지하면서도 1996년에는 박재홍, 1997년에는 이승엽과 끈질기게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각각 25개와 3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재차 삼차 그리고 좀더 높은 수준에서 그런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장 선동열의 대를 이은 것은 조계현이었다. 선배 선동열보다는 롯데의 최동원을 더 닮은 듯 싸움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성있는 승부를 즐기던 그는 90년대 들어 완숙미를 더한 모습으로 정점에 올랐다. 1993년과 1994넌에는 17승과 18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에 1995년에는 1.71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왕에 등극하며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로 인정 받게 되었던것이다. 그 조계현에게 1996년은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준 전성기의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지만 무려 11경기를 완투하는 등 191.2이닝 을 평균자책점 2.07로 버티며 16승을 올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준 것은 역시 그 였다.
그리고 1989년 입단한 이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두자릿수 승리를 올려준 이강철이 있었다. 물론 첫 4년 동안 처럼 해마다 200이닝 안팎을 감당하며 15승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페이스는 아니었지만 5년차였던 1993년 이후로도 그는 기복 없이 해마다 150이닝 이상을 던지며 2점대 중반에서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과 두 자릿수 승리를 이어갔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선동열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은 활약을 해준 반면 약진하며 선동열의 빈틈을 메워준 신진 에이스는 이대진이었다. 입단 첫해부터 상대팀 에이스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전 구단 상대 승리투수가 되는 심상치 않은 내력 속에 10승을 올리며 실한 떡잎을 보였던 이대진은 방위복무를 마치고 제대로 발을 들은 1995년부터 에이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5년에 2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리며 조계현에 이어 2선발급으로 부상한 그는 이듬해인 1996년에 16승을 올리며 조계현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다시 1997시즌엔 다시 17승으로 하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그리고 조계현과 이강철 그리고 이대진이 이룬 삼각편대에 더해 예상밖의 힘이 되어준 신인투수가 한 명 있었다. 1996년 해태의 지명을 받은 세명의 고졸우선지명자 중 대학진학을 택했던 서재응, 김상훈과 달리 프로를 택했던 나머지 한명 진흥고 출신의 우완 정통파 투수 고 김상진이었다. 역시 묵직한 직구를 주무기로 하던 김상진은 입단 첫해였던 1996년과 이듬해인 1997년에 각각 9승씩을 거두며 바로 몇해 전 이대진이 보여 주었던 것과 닮은 출발을 보였다. 그것은 이종범과 이대진을 중심으로 이미 선동열 김성한 김봉연 김정수같은 선배들을 빈자리를 말끔히 채워 넣은 2세대였던 것이다.
1991 시즌[39] 과 1993 시즌은 압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해였다. 1991 시즌은 79승 5무 42패(.647), 1993 시즌은 81승 3무 42패(.655)로[40] 2위와 7~8경기차로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독주를 하였다. 특히 1991년 해태 팀의 FIP+는 각팀의 시즌 단위로 원년부터 2018년까지 적용했을때 1위다.[41] 1996 시즌과 1997 시즌은 상위권 4팀이 용호상박인 상태로 치고받았지만 역시 관록의 해태가 2위(쌍방울, LG)를 근소한 차이로 밀어내며 페넌트레이스 1위를 지켰다. 1990년대의 해태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의미있는 것은 모두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해태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는데 우승한 시즌에는 그 해 페넌트레이스 2위팀에게 '''약했다는 것'''이다. 1991년에 빙그레와 상대하며 8승 3무 7패로 아주 근소한 우위이기는 했지만 단일팀에게 3무를 기록할 정도로 피튀기는 접전을 많이 벌였으며, 1993년의 삼성(7승 11패), 1996년의 쌍방울과 1997년의 LG(각각 8승 10패)에게는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1996년을 제외하면 한국시리즈에서 그 2위팀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주며 패권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1996년에 페넌트레이스 4위로 준PO, PO를 모두 이기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고전하기도 했다. 최종시리즈전적 4승 2패, 정명원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승은 했지만 타선의 후유증은 정말로 심각했다. 현대도 당시 해태의 뒤를 이은 타격 랭크 7위 였고 전술한 듯이 투수진들 아니였음 망했을 뻔 했다.
시즌 팀 방어율 1위를 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못 나간 팀이 있는데 그게 바로 1995년도의 해태였다. 그 때는 타율이 .242(7위)로 엇박자를 달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3위와 4위가 3.5게임 차이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42]
모두가 두려워한 무적 해태의 전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단 팀 전럭 자체가 워낙 막강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1980년대 이후 호남지역의 아마추어 야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 매년 마다 전국 최정상권의 우수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해태는 별다른 노력없이도 1차지명을 통해 즉시 전력감의 유망주를 꾸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해태 유니폼을 입은 신인들은 우승경험이 있는 좋은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량이 향상 됐다. 물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법이다. 강럭한 카리스마를 자랑한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이 아니었다면 저마다 개성이 강한 해태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하나의 팀으로 뭉치게 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매년 코치진을 갈아 버리는 몇몇팀과 달리 해태는 코치진에 큰 변화가 없었기에 지도방식에도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었다. 또한 코칭스태프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게 해태가 연속 우승을 따낸 비결이다.
강력한 위계질서는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선스단 내에서도 존재했다. MBC, 해태. 빙그레 등 세팀을 경험한 유승안 감독은 해태는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광장히 엄한 팀이었다. 심지어 1년 차 선후배 간에도 위계가 분명했다고 밝혔으며 신동수 코치는 위계질서가 나쁘게 작용할수도 있지만 해태에서는 팀에 확실한 구심점을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차동철 감독은 투수조는 선동열을 중심으로 타자 쪽에서는 김일권 김봉연 김준환 등 고참들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잘 뭉쳤다. 팀 구심점이 있고 선수들이 하나로 뭉치는까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또한 이는 해태 특유의 끈끈하고 강인한 팀 분위기로 이어졌다. 유승안 감독은 해태 선수늘은 초반에 밀리더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었던 것도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들이힘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 연봉에 대한 개념이 처음부터 안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곳이었던 해태에서 그나마 선수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국시리즈 우승밖에 없었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은 연봉이 워낙 짜다보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열망이 컸다고 회고했고 유승안 감독은 같은 보너스라도 해태에서 주는 천만원과 빙그레에서 주는 천만원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밝혔다. 좀 과장하면 해태 선수들은 그 천만원을 1억으로 보는 반면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백만원 쯤으로 봤다고 보면 된다. 해태 선수들은 기필코 보너스를 받아내겠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이라면 다른 팀 선수들은 받으면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와 같은 작은 무대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43] 1990년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각각 삼성과 롯데에 패하면서 탈락 했고 1994년에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2연패로 패퇴했다.[44] 거기다 해태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 차별과 억압에 울던 그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 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한 몸짓이자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대리전이었고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도 같았다.
2.4. 타이거즈의 암흑기 (1998~2001)
2.4.1. 1998년 시즌
그러나 1998년 이후로 해태는 레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 회사인 해태그룹이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45]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팀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본인들이 원해서 간 것도 있지만, 팀 입장에서는 '''현금'''확보를 위한 면이 컸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향후 10년은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주목했었다는 점에서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의 해외 진출에 묻혀서 그렇지 한때 에이스 역할을 하던 조계현을 현금 4억원에 삼성 라이온즈[46] 로 합의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액연봉자인 이순철을 방출시키는 등,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47]
1998년 전체만 보면 말 그대로 "종범이만 있었어도" 정도로 괜찮았다. 에이스 '''이강철이 15승'''을 거두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차기 에이스였던 12승을 거둔 '''이대진'''도 현대와의 경기에서 '''10타자 연속 삼진''' 잡을 정도로 건재했으며 어린 유망주 김상진이 생애에서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듯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마무리에는 데뷔 3년차 신인 '''임창용'''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었다. 일부는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보다 이 시기에 더 강력한 구위를 구사했다고 평가한다. '''statiz 기준 1998시즌 WAR 1위는 임창용'''이었다.
게다가 타선도 나쁘지 않았다. 김창희가 조금이나마 성장세를 보이고, 장성호, 이호준이 본격적으로 3할 타자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종범이 해태에 잔류해서 계속 1996~97년처럼 호령했다면 짜임새는 더 좋았을 뻔했다. 용병도입 첫 해인 만큼 다른 팀처럼 OB의 타이론 우즈는 바라지 않아도 우즈 다음으로 현대에서 맹활약 하던 스캇 쿨바급의 용병이 있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아니 숀헤어가 규정타석 채워서 .280 15홈런만 쳤어도..
전체적으로 투수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강철-이대진의 원투펀치와 임창용의 철벽 마무리의 조화가 최고인 시즌이었다. 장성호는 15홈런+타율 5위를 기록하면서 볼넷도 골라내는 대단한 1번타자였다. 여기까지 장성호는 이종범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주루스피드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클린업의 축이었던 홍현우와 성님이 조금 부진[48] 했다. 그것은 이 해 해태가 최저득점(489)을 올리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째튼 장성호와 이호준의 성장으로 99년에는 해태 타선에 양준혁과 용병 2이 가세함+홍현우의 각성으로 가히 핵폭발을 일으키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마지막 OB와의 2경기를 남기고, 해태는 분수령에 서있었다. 2경기를 모두 이기면 시즌 3위[49] , 1무만 거둬도 플레이오프 진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OB에게 2연전 싹쓸이패. 특히 마지막 경기는 임창용이 '''3회에 등판했음에도 11:5로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해태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이종범이 있었다면, 그래서 몇 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었다면 1998년 포스트시즌의 양상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종범이가 아니라 중박이상 치는 타자 용병, 타이론 우즈급은 아니더라도 쿨바, 치멜리스 하다못해 숀 헤어가 풀시즌 .260 15홈런 정도만 하는 외국인 선수였다면 이런 탈락은 없었을 것이다.[50]
2.4.2. 1999년 시즌. 최강의 거포군단. 그러나 성적은...
IMF 후폭풍으로 해태그룹은 점점 망조를 타고 있었고,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8년 시즌 후 타이거즈는 주력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팔려갔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임창용. 대가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등등을 얻어오긴 했다.[51] 하지만 이들도 임창용의 구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53] 그나마 쌍방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쌍방울의 상황은 이보다 더더욱 비참했다. 해태는 이종범과 선동열의 이적료&임대료를 매년 수십억씩 받기라도 했지 쌍방울은 이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데려옴으로서 1999년은 해태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엄청난 '''화력을 뿜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1999년, 해태 타선은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핵방망이를 연신 터뜨려댔다. 종범이가 도루하고 1점 올리던 그런 득점력에 평균득점력 +1 을 달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도루를 굳이 안해도 홈런이 매일 터져주니.. 양준혁의 가세에, 기존의 홍현우, 장성호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며 트레이시 샌더스, 스토니 브릭스 두 용병 또한 출중한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혁이라는 핵우산 효과가 엄청났다.[54] 샌더스의 40홈런은 2009년 김상현도 넘지 못한 역대 타이거즈 최다 홈런 기록이다.[55] 그해 팀홈런 개수만 210개를 기록하며 당시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고 이 기록은 이마양으로 대표되는 2003년 삼성이 213개로 갈아치운다. 허나 몇몇 포지션에 생긴 구멍과 붕괴한 투수진 문제로 승률은 .457(전체 7위)에 그쳤다.
시즌 보정을 하지 않으면 2017년에 이어 역대 타이거즈 2위의 타선이었다.[56] 한 경기 3홈런은 무려 24회를 기록했으며 4 홈런 이상 경기도 8번이었다. 4게임 중 1게임은 3홈런이상 경기였으며, 10득점도 우습게 해댔다. 광주구장에 심심할 때마다 A를 새길 정도로.[57] 1999년이 아무리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어도 해태의 21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1999년 해태는 팀 홈런 말고도 프로야구에 여러가지 기록을 세웠다. 팀 최다홈런(210),[58] 팀 최다 득점,[59] 그리고 순득점(득점-실점)이 많은 팀 중 최초의 7위 달성. 구장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해태타선은 '''잠실 19경기에서 23홈런'''을 쳤다.[60][61] 이수치를 가지고 만약 이해 해태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이었다면? 산술적으로지만 '''잠실에서만 9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62] 원정경기까지 감안하면 210 홈런까진 아니어도 190 홈런정도는 충분히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리그 1위를 다투는 핵타선을 가지고도 7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전년도 핵심투수 4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나머지 투수들이 매울 수 없었고 답이 없는 해태의 수비진이 되버려서 수습이 안되었던것이다. 우선 선발 에이스 역할을 하던 이대진이 그동안의 누적된 관리부실로 인해 결국 부상으로 누웠다. 이강철은 10년동안 정말 잘 던져줬으니 그만큼 피로도 많이 쌓였고 시즌을 통째로 쉬게 되었다. 3선발 젊은 피로 주목받던 김상진마저 청천벽력같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결국 이듬해인 1999년에 시즌 도중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뒷문을 잠그던 진정한 핵심 투수 임창용은 30억원에 삼성에 팔려가고 말았다. 결국 전년의 핵심투수 4명이 이대진의 1경기 말고는 아예 등판하지도 못하게 된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샌더스 양준혁 홍현우의 100홈런보다 더 많은 승수를 올려주던 투수들이 누워버렸다. 이건 지금 어느팀이 와도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투수가 리그 최하위냐 하면 그건 아니고 8구단 6위정도는 했다. 더 못던진 팀은 LG와 쌍방울이다. 투수들을 이닝별로 살펴보면 22살의 신예급 유동훈이 155.1 이닝[63] 을 던지며 ERA 4.75를 기록해 리그 평균보다 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한 곽현희는 팀 최다승인 11승을 기록했지만 '''평균 자책점은 무려 6.15'''이나 되었다. [64] 오철민 최상덕 박진철도 리그 평균보다 조금 못한 수준으로 이닝을 채워갔다.[65] 쌍방울에서 온 오봉옥이 3점대 초반으로 잘 던져줘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시즌이다. 까치 김정수의 해태 마지막 시즌이었고 이때도 구원으로 곧잘 했다.
수비진도 영 아니었다. 타이거즈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수 '''김종국'''은 부상으로 단 3경기만 출장하였으며,[66] 그 수비 안 좋은 장성호는 '''좌익수''', '''1루수'''를 떠돌아다녔고 때에 따라서는 흠좀무하게 '''중견수'''로도 나왔다. 삼성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어디서든 최선을 다했던 양준혁은 지명타자와 1루수로 주로 나왔으며 이호준도 그 전해 지명타자에서 3루수~1루수를 전전하였다. 그나마 고졸 1차지명으로 '''정성훈'''이 입단해서 3루를 봐준게 다행이었다. 당시 용병제도 도입 초창기상 비슷한 팀이 많았지만 해태는 유독 타력이 좋아도 떠도는 선수가 많았다.[67]
2.4.3. 왕조의 멸망
2000시즌도 암울했다. 요약하면 투수력은 작년과 같은데 타격이 한 해만에 역대 타이거즈 최악으로 변했다.[68] 8팀 중 6위로 마친게 다행일 정도다. 전년도 우승팀 한화 이글스와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손잡고 나란히 바닥을 기어주며 오히려 전년보다 1단계 올라갔다. 팀 최악의 타선 답게 20홈런 타자가 없었다.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는 최상덕 1명인데 ERA가 4.56으로 리그 평균급이다.[69] 타격이 좋았던 작년과 달리 팬들에는 정말 재미가 없는 시즌이었다. 장성호가 출루율왕을 먹어서 그나마 타이거즈의 꼴찌 추락은 막아줬다.
과정을 살펴보면 1998~1999 시즌에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했던 이호준을 2000년 시즌 중 성영재를 받고 SK 와이번스로 보냈다. 이강철은 삼성에 FA로 이적해서 2000시즌부터는 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26세의 이대진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00이닝 이상을 잘 던져서 팀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이것이 자신의 투수인생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외 투수는 오봉옥과 SK에서 넘어온 성영재가 잘했고, 구원진의 이병석, 곽채진도 제몫을 했다. 그리고 이게 전부였다. 유동훈은 2년차 징크스로 묶였다. 이강철의 삼성 FA이적 보상선수인 박충식은 재활중이였기 때문에 전혀 나오지 못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5월 18일에는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고 원정경기나 제2홈구장 경기만 해오던 해태가 (사유는 후술할 문단 참조) 2000년에 오랜만에 5월 18일 홈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송진우에게 노히트노런 패배를 당했다.
무려 외국인 선수 6명과 계약한 해였다. 1999년 현대에서 뛰던 피어슨과 말레이브를 영입했다가 조기 퇴출. 포조와 베스를 데려왔으나 이들도 잠깐 뛰고 퇴출. 이후 미첼과 타바레스를 영입했다.
2000시즌이 끝나고 결국 1년전부터 해태를 떠날것이라는 소문대로, 1983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옮겼다. 김응용 밑에서 타격코치로 있던 김성한 감독이 2001년부터 감독이 되었다. 주전 3루수인 홍현우마저 FA를 통해서 LG 트윈스로 이적해버리면서 장타력이 있는 선수가 남아나지 않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
2001 시즌 해태는 그야말로 해태의 비밀번호 5-7-6을 찍었던 종전 3년을 뒤집을 정도로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는 작년이나 제작년처럼 6위권인데 암울한 타선이 리그 평균급으로 살아났다. 외국인투수 레스덕에 그나마 숨통이 틔였으며, 홍세완 이동수 신동주 산토스들이 역할을 해주었고 이종범도 한국으로 돌아와 45경기지만 역시나 잘해주었다. 7월 29일 삼성과 마지막 경기를 벌일 때까지 4위를 놓치지 않았다.[70][71]
그리고 2001년 8월 1일,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당시 전라남도 및 광주광역시 연고 기업 중 가장 대기업인 금호그룹에서 타이거즈를 인수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끓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 구단에 관심이 없는 데다가 자신들의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룹이여서 무산되었다.[72] 때문에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프로 팀을 창단하려 했고, 그 산물이 인천광역시 연고의 금호생명 여자농구팀이었지만 투자는...
금호그룹 대신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동에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군용 및 상용차량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었던 기아자동차가 인수하게 된다. 기아자동차의 인수에 대해 광주광역시 지역 여론은 좋은 편이었다. 기아자동차는 1976년에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호남에 자동차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다.[73] 이 부분은 기아자동차 항목을,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 항목을 각각 참조.
3. 팀 컬러
붉은색으로 대변되며 빨간상의에 검정하의의 유니폼이 상대팀들에게 무시무시함으로 통했는데, 이 디자인은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이 자신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3.1. 소수정예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때부터 자원이 많지 않아[74] 소수정예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주전과 백업선수들의 기량차는 엄청났으며, 이렇다 보니 2군도 원년 멤버 프로야구팀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타팀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2군을 만들고 있었으나, 해태는 그보다 한참 늦은 1994년에 2군을 신설했다.[75]
이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었음에도 2군 시설은 여전히 부실했고, 팜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2012년 2군 구장을 새로 리모델링하며 상황이 나아졌다. 코치의 수도 전구단에서 가장 적었고, 2000년대 이전까지는 코치도 순혈만을 선호하여 타팀 출신은 거의 오지 못했다.
3.2. 투수 왕국
'''KBO 역대 최고의 오버핸드, 사이드암, 언더핸드 투수를 다 가졌던 팀'''[76] 으로 해태 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어본다면 많은 이들이 선동열, 조계현, 임창용 등의 투수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정도로 해태에는 뛰어난 투수들이 많았다. 해태의 에이스는 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반드시 꼽혔을 정도다. 해태의 투수진은 1998년 IMF 사태로 모기업이 부도나기 전까지는 매우 탄탄했다. 1980년대에는 선동열, 이상윤, 차동철, 방수원, 김정수, 문희수 등의 쟁쟁한 투수들이 가득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선동열-조계현-이강철로 이어지는 강력한 선발라인을 가졌으며, 1990년대 중후반에는 선발 조계현-이강철-이대진 으로 이어지는 원투쓰리펀치에 선동열-김정수-임창용으로 이어지는 언터쳐블 마무리, 또 임창용, 김상진 등의 떠오르는 신예들을 축으로 우승을 이룩하였다.
야구도 결국 많은 득점과 적은 실점을 통해 승리를 해야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투타 중 한쪽이 약하면 우승을 하기 힘들다. 9회 우승을 거둘 만큼 잘했던 팀이었기에 타선도 좋았다. 그러나 '''해태는 기본적으로 투수력이 타격보다 좋았다.''' 해태는 1985년과 무너져 가던 말년의 1999년, 2000년 말고는 최소 리그 평균급, 대다수의 시즌에서 리그 상위권의 투수력을 선보였다. 1980년대에는 방수원, 신동수, 김정수가, 1990년대에는 기존의 김정수와, 송유석, 선동열, 임창용이 중간계투나 마무리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해태 투수진은 난공불락이었다.
해태의 9번 우승을 살펴보면 1983년 타격의 힘으로 보통의 투수진인데도 우승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6, 1987년은 투수들이 더 잘해서 우승을 했고, 1988년은 타선도 매우 강했으나 투수가 그보다도 더 강력하게 리그를 지배해서 우승했다. 1989년도 역시 투수가 더 잘했어 우승. 1991년은 타격이 강했으나 투수가 매우 좋아서 우승공로가 더 컸다. 1993년도 투수는 삼성과 비슷하게 리그 탑이었고, 타선은 삼성의 강타선과 급차이가 나는 2위급이었다. 그러나 중요할때 투수들이 삼성 타자들을 눌러버려서 우승했다. 1996년과 1997년 역시 중위권 타격팀을 투수들의 힘으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즉, 리그에서 우승패턴을 살펴보면 타격이 중위권인데 투수가 좋아서, 타격이 상위 혹은 1위였는데 투수는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잘해서 우승을 했다.
3.3. 엄격한 군기
해태는 다른 팀에 비해서도 군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구타와 같은 폭력과 결부되는 똥군기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감독부터가 버젓이 TV 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선수들을 구타하는 위인인지라 코치진들도 선수들에게 욕설이나 구타를 항상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최향남의 경우 신인시절 해태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해 '''군대를 현역으로 갔으며''', 한대화가 1993년도 시즌 끝나고 LG로 트레이드 된 것도 이런 똥군기로 인한 감독과의 불화[77]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 이런 상황인지라 다른 팀 선수들이 해태에 트레이드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LG 소속이었던 손혁과, 두산의 최용호[78] , 그리고 삼성의 양준혁이 그 예. 1996년에는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다 터져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79]
- 사사구에서 이병훈 해설이 밝힌 당시 해태 분위기에서도 언급하는데 이 시기에는 타 팀의 이적생들, 특히 호남 이외 지역 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우리 선수 아니다' 는 식으로 천대를 받은 듯 하다. 그래서 이런 대우에 빡친 이병훈이 이호성과 주먹다짐을 했다고 한다.[80] 다만 타 구단에서 나이 많은 선수가 들어올 경우 해태 팀내 고참이 "나와 비슷한 연배니 잘 모셔라."라고 얘기하면 군기 바짝든 후배들이 직속 선배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81] 이렇게 비호남권 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배척의 문화가 강했던 팀이지만 그렇다고 타지 출신 중에도 타이거즈 선수단 문화에 적응해 성공한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다. 대구 출신의 서정환[82] 과 이범호[83] , 대전 출신의 한대화[84] , 인천 출신의 최상덕[85] 등이 대표적 사례.
- 박충식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런 구타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하며, 팀내 멤버 중에서 나이가 3년차 이상은 "형", 5년차 이상은 "선배"라고 부르도록 호칭도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배에 대한 인사도 일단 정지후 90도 하도록 했다.[86] 참고로 타 팀에서는 보통 나이 차이가 7~8년 이하면 XX(이) 형, 그 이상이면 XXX선배님[87]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30대 중반을 넘긴 최고참급의 선수만이 모든 선수들한테 선배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해태에서의 호칭법과 인사법
- 1994년 해태 소속이었던 한대화가 LG 트윈스로 가서 했던 일이 군기 잡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LG 트윈스는 신바람 야구란 컬러로 젊은 선수들이 서로 형, 동생하는 사이인 것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기강이 해이해질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령이나 커리어나 고참급이었던 한대화가 군기반장을 했다고 한다. 해태와 LG의 팀 분위기를, 더 나아가 해태와 나머지 7개구단의 팀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1997년 LG 트윈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후 얼마 안 되어 최훈재가 이종범, 홍현우, 이대진[88] 이 같이 운동장에서 도시락을 까 먹는 것을 보며, "너희들 밥 먹니?"라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이 먹는 것을 쓰레기통에 치우고 운동장에서 다시 연습하러 갔다고 한다..... 또 어느 때는 최훈재가 연습 끝나고 연습 장비를 치우려고 하니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바로 치웠다고. 이때 당시 최훈재는 LG에서 이적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으며, 후에 회고하기를 자신이 뛴 어느 구단에서도 그렇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89]최훈재 일화 #1
- 양준혁이 해태로 이적 후 마련한 광주의 아파트에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했을 당시, 팀 후배이자 영남대 후배인 오철민[90] 과 곽현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삿짐 정리까지 다 했다고 한다. 강태원 딸의 돌잔치 때 일부러 양준혁이 늦게 갔으나 해태 선수들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경기장에서 후배들이 그라운드 정리와 선배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혼났다고 한다.양준혁이 말하는 해태 시절
- 가끔 경기 후 집합이 걸렸는데 카리스마 군기반장 오궁갑이 악역을 맡았다.이병훈이 해태에 간 첫 날
- 이종범과 홍현우가 짬밥이 낮던 시절 팀 분위기도 안 좋은데 캐치볼 도중 웃었다는 이유로 맞았다.이종범 뺨 맞은 사연
- 데드볼에 맞아도 아픈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 해태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던 정성훈도 군기를 꽤 잡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김태군,양석환 갈구는 정성훈
- 그러나, 이강철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군기가 강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이강철이 말하는 해태
빡센 군기와 열악한 운동 환경과는 달리 '''소속팀에 대한 선수들의 충성도가 강한 걸로도 유명'''하다. 특히 해태의 영광을 겪었던 선수들이 더 그렇다. 서정환, 최상덕, 김상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장성호, 임창용, 홍세완, 유동훈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92] 김상현처럼 트레이드 되자 가기 싫다며 거부, 심지어 울었다는 에피소드가 꼭 들어있다.
이런 걸 감안하면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는 엄격한 군기나 열악한 운동 환경, 부실한 모기업 지원과는 별개로 외부에서는 다 알 수 없는 상당한 매력이 있던 팀으로 보인다. 사실 해태 타이거즈로의 이적을 거부한 끝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양준혁 같은 경우도 위에 캡쳐된 자서전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와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와 분위기를 상당히 맘에 들어했고 그 후에도 타이거즈에 대해 좋은 말만 했으면 했지 절대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임창용이나 이호준, 정성훈, 장성호는 이적 후에도 친정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93] 이는 기아로 바뀐 이후에도 이어져 신종길 같은 경우는 한화시절에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은 고향팀 아니면 안 간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또한 임창용도 해태에서 삼성으로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기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고 트레이드까지 요청했었을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돌고돌아 우여곡절 끝에 기아로 다시 돌아왔다.[94]
3.4. 부실한 연봉과 지원
요약하자면 타이거즈는 모기업이 해태'''여서''' 9번 우승한 것이 아니라 해태'''였음에도''' 9번 우승한 것이다.
모기업 해태가 일단 공업화 정도가 낮았던 호남지역의 기업이었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부실했다. 그리하여 프로야구 구단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었다. 구단의 연봉협상 관계자가 신인 계약금을 받으려는 이종범에게 "광주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받는 것보다는 광주에서 7000만원을 받는게 낫다"는 드립은 유명하다.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당대의 삼미 슈퍼스타즈나 오늘날의 서울 히어로즈처럼 재정이 영 좋지 못했고,[95]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최소한 2000년대 후반 넥센처럼 트레이드를 대놓고 하는 악행은 아니었더라도[96] 1980년대 프로야구 구단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해태의 경우 오프 시즌 때 연봉 분쟁이 거의 연례행사이다시피했다. 그런데 이것도 종범이와 동열이가 없었으면 쌍방울처럼 꼴날뻔했다.
당시 대구아재들이 일으킨 해태 버스방화 사건이 있었을 때 홈 구단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버스 수리비 및 버스안에 들어있었던 해태 선수들의 물품에 대한 보상도 이뤄졌었는데, 후일 김봉연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해태 선수들은 실제 피해액 말고도 버스안에 있지도 않았던 양복이나 야구 물품들이 불탔다고 보상을 요구했고 그런 것들도 삼성 측에서 군말없이 보상을 해줬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해태의 지원이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선수단에 대한 대우는 1990년대 쌍방울만큼이나 악명이 높았다. '''차라리 삼청태가 해태보다는 나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부상선수들의 재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자비로 재활훈련을 하는 등,[97] 지금 기준으로 도저히 프로 구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1차 선수협 사태의 단초가 됐던[98] '김대현·이순철 교통사고 사건' 역시 해태 구단에서 어떠한 위로도 제대로 해주지 못해 일어났던 일이었다.
심지어는 파파이스 치킨이 먹고 싶다는 외국인 투수 루이스 안두하에게 그냥 광주광역시 양동시장에서 파는 양동통닭을 사다주기도 했다.[99] 이 파파이스 사건과 더불어 당시 김성한 감독이 피칭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강판시키자 분노, 그대로 팀을 떠나버렸다.
특히 1983년 우승에 크게 기여한 메리트 시스템의 폐지와 서울 숙소 교체는 선수들에게는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어 급격한 사기 하락을 가져왔다. 팀 분위기가 무너지면서 급기야는 1984년 4월 10일에는 일명 불고기 화형식 사건이 터졌는데 선수들이 시즌 개막 초반에 구단주가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회식메뉴로 나온 불고기를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태워 버리면서 침묵시위를 벌인 것이다. 김일권이 야구본색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팀내 최고참인 김봉연과 김준환이 계획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1년후배인 김일권의 의사를 물어보고 그가 동조하자 벌인 일이였던 것. 사실 김일권은 오히려 구단주 눈치 봐서 먹는 척이라도 하시라고 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 이후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구단에게 미움받던 김일권이 주동자로 오해를 사게 되었고 급기야 그날 회식 후에 김일권이 김응용 감독에게 항의하다가 따귀를 맞는 일까지 겹쳐 오해는 더 커졌다. 이 사건 이후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버렸고 결국 1988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되는 단초가 된다. 한창 구단이 잘 나갈 때도 이런 판국이었기에, 결국 후에 IMF 외환위기로 그룹 자체가 해체되자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부실해지고 선수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1997년까지도 기세등등했던 성적은 금새 곤두박질쳤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당시 김응용이 있던 삼성을 돌아가고 싶은 구단으로 꼽은 것은 바로 이런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KIA의 인수가 결정되고 이종범은 타이거즈에 복귀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삼성에 가고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고 '''김응용 감독 밑에서 뛰고 싶다.'''라는 이야기였다.
우승 후 선수단에 대한 우승보너스가 만원도 안되는 '''해태제과 종합선물세트'''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해태의 열악한 지원을 비꼰 진담같은 농담. 거기다 1993년에 우승했을때는 앨범제작까지 시키는 기행을 보여줬다. 참고로 아이디어를 낸것은 당시 해태타이거즈 단장인 이상국이다. 우승을 했는데 보너스 줄 돈이 없었는데 그래서 나온 게 '''양수경과 선동열&이종범의 투앤원.'''. 이는 선동열과 이종범이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은 이것도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엔 비웃음거리였다. 셋 다 이름값이 있었던데다가 프로야구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가창료를 당시 돈으로 500만원 가량 받는 등 나름대로 기대할만 했다만 정작 흥행에서 철저하게 망했기 때문이다. 앨범을 3만장 찍었는데 100장도 채 안팔렸고 결국 앨범은 타이거즈 구단에서 직접 매입해서 팬들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주는 신세가 되었다. 이 앨범이 망한 뒤에는 김응용은 선동렬, 이종범이 다치기만 하면 농담조로 코치에게 나이트 자리 알아보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선동열은 덩치와 체력이 좋았지만 당시의 이종범은 마른 체형의 신인이였기 때문에 힘든 스케줄에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구단 담당자 측에서는 "'''롯데에선 아파트 지으면 되고, 삼성에선 컴퓨터 조립하면 된다지만, 우리는 너네 연봉 주려면 과자 몇 트럭을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며 선수들에게 대놓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이병훈 해설위원의 일화에 의하면 연봉 협상하는 자리에서 "너, 선동열한테 연봉 주려면 맛동산하고 써니텐 얼마나 팔아야 하는 줄 알아?"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선동열도 현역시절 연봉 1억을 요구했더니 구단 담당자 왈, "야, 1억이면 아카시아껌을 몇 통이나 팔아야 하는지 알아?"[100] 라고 답한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당시에 이병훈도 구단 담당자에게 "부라보콘도 있잖아요?"라고 맞받아쳤다가 더 혼나기도 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말을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빗대보자면 (실제로 기아가 이러진 않았지만) '''"니 연봉이 쏘렌토 몇 대인 줄 알긴 하냐?", "너희들 연봉 주느라 카니발 몇 대나 조립해야 하는지 알아!"''' 라고 말하는 식이다. 물론 쏘렌토나 카니발 한 3~40대 정도 팔면 현행 고액 연봉자 연봉이 나오고, 그랜버드 한 100대 정도 팔면 특급 FA를 잡을 수 있지만 맛동산, 부라보콘은 정말로 몇십 만 단위로 팔아야 나오는 금액이다.
후에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간 이후 박건배 전 구단주는 전 해태 선수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라도 해서 팀을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그 당시 섭섭하게 했던 건 미안하네."''' 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김응용의 말에 의하면 박건배 회장은 야구단에 돈을 쓰고 싶어 했으나 박건배 회장 아래 이사진들이 야구단에 돈쓰는건 돈낭비라고 했다고 하며 박건배 회장을 옹호하고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이후 해태그룹은 전자사업, 중공업사업까지 진출하는 몸집불리기를 했는데, 1990년대에 재계서열 30위 안에 들어갔기는 했지만 IMF 크리를 맞고 쌍방울과 선수를 팔아 연명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결국 야구단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연습 구장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체력단련실은 일개 동네 헬스클럽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태제과에서 생산하는 일부 제품들 문서를 보면 "너희들 연봉 줄려면 ○○○ 몇 개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는 개드립이 달려있다. 이 개드립의 예외라면 해태 타이거즈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인수된 이후에 출시된 마루시리즈[101] , 오사쯔나 허니버터칩 정도이다.
이렇듯 구단의 재정이 열악했던 탓에, 해태가 강팀이었던 것을 못내 아쉬워 했던 타 팀 선수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밥 먹듯 우승하는 해태 선수들도 고작 그 돈 받고 뛰는데, 너희가 무슨 낯으로 그 연봉을 원하느냐" 라는 말이 연봉협상 때마다 나오는 구단 측의 레퍼토리였다는 것.
3.5. 의의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은 다른 팀들에게는 충격과 공포의 전력이었고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특유의 끈끈한 근성야구[102] 는 당시 호남인들의 일상의 유일한 낙이요 희망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해태를 응원하지 않는 타 구단의 야구팬들은 '''"우리 팀이 이기는 것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 해태가 지는 것을 보러온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우스갯소리로 해태 타이거즈같은 국가대표팀 VS 기타 야구 구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당대의 최강 라인업이자 국가대표급의 슈퍼스타들만 모여있던 곳은 명문구단 해태 타이거즈였기 때문이다.
워낙에 전설적인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서 지금의 KIA 타이거즈는 해태의 전설에 좀 눌려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KIA는 해태의 계보를 계속 이으려고 함과 동시에 해태색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야구 오래봤던 올드팬들의 반발이 심해지니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워낙에 성적이 좋은 전설적인 구단이며 호남을 연고로 한 탓에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는 선호도가 높았다. 예를 들면 군산상고를 나온 최해식은 쌍방울이 창단되는 해 졸업하여 지역 우선 지명을 당하면서 '해태 가고 싶은데 1년만 늦게 창단되지...'하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트레이드 되어 해태 선수가 되었는데 최해식의 증언에 따르면 우승 보너스는 나쁘지 않았던 편이라고 한다.
위의 탄생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해태의 재정이 영 좋지 못한 상황에서 구단을 억지로 창단했고 마음대로 해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마냥 해태 구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라도 지역에 대기업이 없는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만약 풍족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창단을 했다면 해태와 같은 성적이 나왔을까. 그런 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도 해태 전성기를 보낸 김봉연, 김성한 등의 OB들의 해태 부심은 대단하다.
하지만, 광주일고 출신인 박재홍은 많은 계약금을 줄 수 없었던 해태를 거부하고 현대와 계약했다.[103]
어쨌든 해태 타이거즈의 선전은 그 자체로 호남 지역 시민들에게 위안과 화합의 매개체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초의 응원단장으로 활동한 임갑교 옹의 활약상과 임갑교 옹의 반주에 맞춰 관중들이 불렀던 구슬픈 곡조의 응원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는 해태의 첫 우승 당시 잠실야구장에서 제창한 것이 유명한 장면인데 프로야구의 출범이 소위 3S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산물이었지만 역으로 호남지역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과정의 상처와 그로 인한 호남 소외 정서를 프로야구 승리의 기쁨으로 표출하는 분출구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을 할 수 있다. 특히 해태의 선전은 1980년대 호남 지역민들의 정치적 울분을 해소하는 해방구로도 해석되기도 했다. 실제로 경기에서 이긴 해태 팬들이 승리의 찬가 형식으로 목포의 눈물을 제창한 후 어김없이 외쳤던 구호는 김응용이나 선동열도 아닌 '''김대중'''이었다.
야구 자유기고가 김은식은 2009년에 펴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을 통해서 표출된 호남의 정서를 1980~90년대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연결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당시 '''"타지에 나가 일을 하면서 살던 전라도 사람들에게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전라도 바깥에서 마음놓고 자유롭게 전라도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곳은 야구장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지역연고가 더욱 강했던 시절임에도 해태 타이거즈가 전국구급의 구단으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4. 유니폼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홈경기 유니폼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경기 유니폼을 본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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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정경기 유니폼은 매우 독특해서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빨간상의에 검은 바지였고, 이는 김동엽 초대감독의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해태 런던 드라이진에 붙어있었던 영국 버킹검궁 근위병의 복장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있다. 이 유니폼은 하도 강렬한 인상을 줘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104] 또한 검은 바지는 열을 흡수하여 여름만 되면 선수들이 땀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예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일명 "검빨 쫄쫄이" 유니폼의 단점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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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부터는 원정과 홈경기 유니폼 모두 앞가슴의 "해태" 한글 로고를 영문으로 바꾼 새로운 유니폼이 도입된다.
해태의 검빨 유니폼은 아직도 올드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팬들은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하면, 당연히 하얀색의 홈팀 전용 유니폼만 보다가 검빨 유니폼을 보니 적응이 잘 안되는 모양..
구단 쪽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105]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유니폼을 입은 2연전을 삼성에 전패했고, 이것이 KIA 후반기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광탈했다.
2013년 8월 11일에도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했다. 이날도 삼성과의 경기를 가졌으며, 이번에는 삼성전 연패를 끊는 귀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2020년 6월 20~21일 오랜만에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한다. 상대는 또 삼성이다. 이번에는 문희수와 김봉연의 시구와 시타를 맡기로 되어 있다.
5. 응원가(무등산 호랑이들)
'''선동열과 이종범''', 그리고 양수경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Two&One이 부른 노래.
들어보기
6. 해태의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
KBO 리그 내에서 희한할 정도로 왼손잡이 선수가 희귀하거나 잡아와도 제 역할을 못하는 두 팀[106] 중에 하나였다.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조계현, 이종범, 홍현우 등등 해태왕조를 이끈 선수들은 예외없이 오른손잡이다.[107] 타자쪽에선 그나마 장성호라도 있지[108] 투수쪽에선 왼손잡이는 김정수, 신동수, 강태원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09] 1997 신인드래프트에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였던 좌완투수 오철민을 1차지명하여 계약금 2억 4천만 원[110] 에 입단시키기도 했었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때문에 김응용 감독은 투수든 타자든간에 왼손잡이를 데려오려고 그렇게 동분서주 했고[111] 트레이드로 박노준, 정성룡, 김상훈, 동봉철 등을 데려오고[112] , 결국 양준혁을 데려오면서 그 소원을 풀었지만......1년만 뛰고 LG행. 1980년대 중반에는 주전 라인업중 이순철 한 명 빼고 죄다 '김'씨에 오른손잡이라서 '김씨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113]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주전라인업중 왼손잡이가 3~4명이되던[114] 1999년에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왼손 타자들은 KIA 타이거즈로 넘어오면서 이용규, 김원섭, 최희섭 같은 선수들이 들어오며[115] 해태 시절에 비해 많이 나아졌고 우투좌타라는 개념이 한국 야구계에 확산되어 좌타자가 더 많아진 뒤에는 오히려 우타자가 품귀해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으나, 왼손 투수는 여전히 없다시피할 정도다. 왼손으로 공 던질줄만 알면 투수한다는 농담이 공공연히 돌 정도. 그나마 2009년 이후에 양현종이 포텐이 터지면서 조금은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왼손으로 공 던진다는 이유로 1군에 있는 투수는 수두룩하다.[116][117]
6.1. 해태의 좌타자 계보
- 김일환 (1983~1987)
-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였으나 이듬해 해태로 트레이드된 1루수. 실업야구 한국화장품 시절에는 27경기 연속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운 강타자였으나, 해태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등에 밀려 잘해야 백업 신세였다. 1987년 태평양으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할 때 까지 통산성적은 타율 0.240, 76타점, 8도루였고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그래도 최동원 상대로 9회에 동점타를 친적은 있다. 그리고 그 적시타로 인해 이 날 경기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 송일섭 (1983~1988)
- 1983년부터 해태에서 뛰기 시작한 좌타 외야수이다. 그가 그때부터 이적한 88년까지는 87년 박철우, 88년 김성규 빼고는 그가 정말 말 그대로 유일한 좌타자였다. 1985년 해태에서 103경기 338타수 104안타 15홈런 41타점 타율 0.308을 기록했다. 이후 1989년 빙그레에서 반짝 부활한 것을 빼면, 주로 대타 전문으로 활동했다. 해태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 뛰었고, 빙그레에서는 중견수도 봤다.
- 김성규 (1988~1991)
- 1988년 입단한 외야수이다. 해태의 좌타 갈증을 풀어줄 듯 했으나, 기대에 비해서 너무 못했다. 첫해 80경기 출장해 타율 2할 8푼에 8도루로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시즌의 1/3도 못 뛰고 타율은 1할 5푼대로 추락하더니 그 다음해도 겨우 80경기 뛰고는 0.245에 6타점 2도루. 1991년까지 뛰고 쌍방울로 이적해 1993년에 은퇴했다.
- 박철우 (1987~1993)
- 1987년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가 전성기 찍고는 지명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 1993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한 선수. 큰 덩치와 느린 발로 전형적인 거포의 외형이었으나, 커리어 하이인 1989년 홈런이 13개였다. 타율도 3할을 넘긴 것은 1989년밖에 없었다(0.318). 하지만 좌타자가 그밖에 없었던 해태의 사정상 중심타선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짧고 굵은 선수생활을 했다.
- 933경기 출장 2813타석 2487타수 695안타 58홈런 370타점 통산타율 0.280
- 아들은 두산 베어스 포수 박세혁이다.
- 박노준 (1992)
- 1992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1991년 OB에서 타율 0.293에 19도루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성기를 계속 구가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92년 딱 서른이 되던 해 해태에서의 성적은 2할 4푼에 11도루. 그나마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게 사실상 해태시절의 전부였다. 그리고 1시즌만 뛰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살림살이 어려운 3연속 OB-해태-쌍방울 테크트리라니 안습. 보통 이런 테크트리(강팀-열악한 강팀-신생팀)면 그냥 어영부영 은퇴할텐데...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보란듯이 부활한다. 심지어 1994 시즌에는 OB시절에도 못 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김응용이 가장 배아파했을 선수. 하지만, 이듬해 다시 추락하며, 1997년도에 은퇴한다.
- 김상훈 (1994~1995)
- 2000년대 중반 위의 박노준과 함께 직구 아님 변화구, 초시계 드립으로 야구팬들에게 욕을 먹던 SBS 스포츠의 전 해설위원이자 현 SPOTV의 해설위원. 그렇지만 해설위원 시절과는 달리 선수시절은 미스터 청룡/LG라 불리운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대표 타자였다. 1988년 타격왕과 1990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적 직전 시즌인 1993년에는 타율 0.285, 12홈런 71타점으로 주포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연봉협상 마찰과 올스타전 쪼인트 사건으로 한대화와 사이가 안좋던 해태와 송구홍의 입대, 김상훈의 하락세에 의구심을 가지던 LG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12월 1일 한대화,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김상훈, 이병훈의 트레이드가 성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태의 승라라고 생각했으나... 1994 시즌이 시작하자 트레이드의 핵심이었던 김상훈은 부상에 시달리며 2할 3푼대로 주저앉은 반면 한대화는 타율 0.297, 10홈런 67타점으로 부활에 성공하였다. 결국 이해 무너진 김상훈은 1995 시즌까지 뛰고 은퇴를 선언, 이 트레이드는 해태에게 있어 흑역사가 되었다.
- 박재용(1994~1999)
- 이전 왼손잡이 박철우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을 만큼 코감독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하필 후계자라는 작자가 선배의 성적을 단 한번도 못 넘긴것이 컸다. 수비도 당시에 별로여서 지명타자와 1루수를 번갈아 볼 정도였다. 운이 좋았는지, 두 번 우승도 맛보고 우승프리미엄에 경쟁자가 별로 없던 운좋은 시즌을 만나 골든글러브 투표 지명타자 부분에서 2연패를 했다. 그래도 성적이 별로였는지 이 후 1999년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 트레이드 후 → 2000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를 하였다. 2019년 현재는 롯데 자이언츠 2군과 3군 코치 역임
- 동봉철 (1996.05~1996.11)
- 최훈재 (1996.11~1998.12)
- 어떻게 보면 해태의 제대로 된 마지막 왼손잡이 타자 계보의 끝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 LG에서는 김재현과 박준태[118] , 노찬엽, 심재학 이라는 거물급에 밀려서 왼손 대타-외야 백업 역할이었고 96년 11월 6일에 최향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되어 해태로 오게 되었다[119] . 해태에서의 2년간은 97년엔 3번타자로 뛰며 우승을 이끄는 등 상당히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면서 탈쥐효과를 입증하나 싶었으나, 트레이드 당시 LG로 건너간 최향남의 포텐이 터지면서 묻혀버렸다. IMF 이후 재정난이 심해진 해태는 최훈재를 1998년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당시 OB)로 넘기면서 그와 해태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가 몸 담은 시절 3팀 모두 우승을 하는 진기록을 보았다.
- 양준혁 (1999)
- 1999년에 주전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으나, 해태에 오기 싫다고 트레이드 거부를 외친 점이나, 양준혁의 맞트레이드 상대인 손혁 역시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 계보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 이미지도 별로 좋지 못하다.
- 트레이시 샌더스 (1999)
- 40년 가까이 된 타이거즈 역사상 한시즌 최다홈런의 주인공이자 타이거즈 선수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0홈런을 친 외국인 선수. 타율은 .247로 평균만도 못했고 무려 133개의 삼진을 당했으나 4할이 넘는 출루율과 6할에 가까운 장타율로 뛰어난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이버메트릭스 및 ops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낮은 타율과 많은 삼진으로 인해 저평가 당했다. 게다가 이미 개막장으로 몰린 해태구단의 재정으로 인해 재계약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0년에 팀 최다홈런선수가 14개인 장성호, 홍현우 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코감독은 시즌 내내 샌더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2년후에는 샌더스보다 홈런은 좀 적지만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3할을 치는 산토스가 오며 다소 위로를 하게 된다.
7. 여담
7.1. 5월 18일에는 광주 경기를 하지 못한 팀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 원년인 1982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17년간 5월 18일에 광주에서 경기를 한 적이 없다. 5공 군사정권은 KBO 리그 출범 기획 과정에서 지역감정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당초 지역연고제 도입을 반대했으나 참모들의 설득으로 허락을 했고 결국 호남 연고팀으로 해태가 창단됐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는지 KBO에 압력을 넣어서 5월 18일에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리지 않게끔 일정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 의견이 '''2017년 실제 문건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KBO 리그 초창기에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가 집권세력으로 시퍼렇게 살아있었기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당시 KBO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5월 15일부터 이틀간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와 삼성의 주말 2연전이 편성돼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정부에서 그 시합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해당 경기 날짜가 5월 18일과 가장 가까운 주말이었던 만큼 5.18 추모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야구장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20][121] 그러나 KBO 총재 서종철이 정부 관계자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고[122]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결국 서 총재의 예측대로 이날 경기는 시작 전은 물론 경기 도중과 경기 후에도 아무런 소요사태 없이 경기가 무사히 진행됐다. 당시 리그 사무국 관계자였던 이호헌 선생과 이용일 선생 등의 증언을 들어보자. 다만 1982년 5월 이후 두 번 다시 5.18 즈음 광주에서는 해태의 홈경기가 열리지 못했다.[123]
실제로 2017년 경향신문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의 ‘5·18 대비 광주지역 프로야구 경기 일정 일부 조정’ 문건에서 1986년 5월 17일을 전후해 “광주권 안정을 위한 당국의 권유”라는 이름으로 5월 18일 17시부터 무등 야구장에서 열려고 했던 MBC 청룡 VS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 장소를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바꿨다는 내용이 나온다. 5월 17일 16시로 예정된 경기는 광주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감안해 광주에서 그대로 치렀지만 플레이볼 시간을 앞당겨 15시에 시작하도록 했고 심판들로 하여금 경기를 빨리 끝내게끔 조치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124]
또 다른 기록을 보면 1991, 1993, 1995, 1997, 1998년의 5월 18일에 해태는 전주와 군산 등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즉 1983~1990년에는 아예 해태의 홈경기가 이날 일정에 잡히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는 광주 이웃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의 홈구장으로 가서 경기를 치르게 했던 것이다. 결국 5월 18일에 광주에서 해태의 홈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는 이 암묵적 룰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야 깨진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5월 18일에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린 첫 해는 2000년이었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였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서 해태는 회장님에게 노히트 노런을 조공하는 희생양이 되었다.
팀이 해태에서 KIA 타이거즈로 바뀐 후에는 과거와는 달리 5월 18일에 자유롭게 광주 홈경기가 편성되고 있다. 다만 5월 18일에 홈경기가 편성되면 광주 홈경기에 한해 국민의례 때 5.18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하거나 치어리더 공연을 생략하고 있다.
2019년 스승의 날 이벤트로 엠스플 중계에 출연하신 유수호 옹의 증언에 의하면, 1980년대 광주항쟁에 즈음한 무등야구장 경기 중계 시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코멘트를 하면 관중석에서 중계석으로 물병이 투척됐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무등야구장의 중계석이 관중석보다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MBC 인터뷰에서 김성한 선수도 이 날만큼은 "경기를 꼭 이겨서, 지역민들의 한을 운동장에서 풀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각오가 남달랐다고 한다. 실제로 5월 18일 경기에서의 승률이 9승 2패.
7.2.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성공할 수 없다?
해태 타이거즈는 자타가 공인하는 1980~1990년대 KBO 리그의 맹주였지만, 흥미롭게도 이 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이들이 감독을 맡으면 희한하게도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역대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 김성한, 유승안,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이강철이 있다. 이들은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밥먹듯이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우승을 경험한 선동열을 빼면 감독으로는 누구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대부분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명제를 증명한 이들이다.
해태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감독을 맡은 사람은 1980년대 타이거즈의 주전 유격수였던 서정환이었다. 그는 해태에서 은퇴한 후 1994년까지 해태 코치를 맡았다가 1996년, 본인의 친정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1998년부터 2년간 감독을 맡았다. 감독 재임 기간 내내 삼성 라이온즈를 가을야구로 이끌었지만, 1998년에는 재계 라이벌 LG 트윈스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1999년에는 한국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두고도 롯데 자이언츠에 믿기 어려운 역전패를 당한 후 잘리고 말았다. 2001년 해태로 다시 돌아왔고, 2006년부터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취임 첫 해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한화 이글스에 패하며 탈락했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꼴찌의 불명예를 쓰면서 감독직에서 잘렸다.
타이거즈의 대표적 강타자 김성한은 해태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이었다. 그가 해태 감독으로 취임한 2001년은 구단 매각 문제로 안팎의 사정이 워낙 어수선했다고 치더라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고 팀 이름이 KIA로 바뀐 후에는 구단에 대한 지원이 막강해졌다. 특히 2002년부터 KIA는 리그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으나 한국시리즈 무대는 밟아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만 두 번 연속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2004년 시즌 도중 프런트와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1990년대 타이거즈의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이순철은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있을 시절에는 그럭저럭 호평을 받았지만, LG 트윈스 감독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흑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팀은 가을야구를 나가지 못했고, LG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상훈, 김재현, 유지현을 비극적으로 몰아내면서 LG빠들로부터 거의 매장당했다. 현재까지도 LG빠들은 이순철을 금지어로 칭하고 있다.
OB 베어스, LG 트윈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여러 팀을 오갔지만 타이거즈에 소속됐던 시절이 가장 화려했던 한대화도 프로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한대화의 경우 그가 맡았던 팀의 전력이 안습을 달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아울러 불과 두 시즌만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고, 타이거즈보다 이글스 선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유승안도 1군 감독으로는 사실상 실패했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를 꼽으라면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2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거둔 선동열을 꼽을 수 있겠지만, 선동열의 성공 스토리는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감독 재임 초기였던 2005년과 2006년의 우승은 선동열이 스스로 이룬 성과라기보다는 전임 감독인 김응용의 유산이거나 소위 '''선수빨로 우승했다'''는 비판도 있다. 어쨌든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영광을 안고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에 감독으로 돌아왔지만 5위 - 8위 - 8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선동열의 흑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금메달을 따고도 욕을 먹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국대 감독으로서의 비판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타이거즈 선수 출신은 누구도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9년부터는 타이거즈 사상 최고의 잠수함 투수였던 이강철이 kt wiz의 제3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됐는데, 이강철의 성과에 따라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의 잔혹사가 끊기던가 아니면 이어지던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강철은 비록 포스트시즌에는 한 끗 차이로 못 갔지만, 취임 첫 해부터 5할 승률과 6위라는 순위로 kt wiz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한용덕의 사례처럼 1년 반짝일지는 아직 지켜봐야할 일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지각 개막한 2020 시즌 들어 초반의 부진을 딛고 중반부터 무서운 기세로 승수를 쌓아가며 결국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에 성공했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을 제외하고 해태에서 감독과 코치로 생활한 감독 중에서도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 고작 1명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해태 코치 출신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사람은 해태에서 투수코치이자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인식 감독이 유일하다. OB -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1995년 한국시리즈와 2001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우승과 프리미어12 초대 대회 우승의 성과를 올렸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1994년부터 2년간 해태 2군 감독을 맡았던 김성근도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김성근은 사실상 해태에서 이룬 성과가 딱히 없다.
해태 코치 출신 감독 중 최악의 사례는 김응용 감독 전성기 시절 수석코치 중 한 명이었던 유남호 감독이었다. 타이거즈에서만 코치로 14년을 일한 유남호는 2004 시즌 중반 김성한의 감독직 사퇴로 감독대행을 맡은 이후 2005년 타이거즈 감독에 부임했으나 '''타이거즈 사상 최초의 리그 꼴찌'''라는 거대한 흑역사를 기록하고 한 시즌 만에 잘리게 된다. 이 외에 해태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은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전 소속팀이던 해태를 상대했지만 1무 4패로 무릎을 꿇었고, 이후에는 가을야구 문턱에도 가지 못했고, 해태와 삼성에서 감독대행만 두 번 했던 조창수 코치 역시 감독으로서 올린 성과가 거의 없다.
심지어 해태 왕조의 군주였던 김응용도 해태와 삼성에서는 한국시리즈 통산 12회 출전, 10회 우승, 2회 준우승의 금자탑을 세우지만 2013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았다가 흑역사만 잔뜩 세우고 말았다.
8. 해태 타이거즈 출신 현역 선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단 하루라도 입었던 선수 중에서 여전히 현역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선수는 2017년 시즌 당시 임창용, 이호준, 김경언, 정성훈, 강영식 5명이 남았지만, 2017년 시즌 종료후 임창용과 정성훈을 제외하고 전부 은퇴, 방출되었다.
2016년 삼성에서 방출된 임창용이 기아에 입단했고, 2018년 LG에서 방출된 정성훈이 다시 고향팀 KIA 타이거즈에 돌아오면서 기아는 2018년 시즌에 마지막으로 남은 해태 출신 투수 타자를 모두 보유한 팀이 되었다. 둘 모두 빼어난 실력을 가지고서도 원치 않은 트레이드 대상이 되어[125] 오랫동안 돌고 돌아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8년 시즌 종료후, 둘 모두 은퇴함으로써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현역선수는 전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020년 현재 해태 타이거즈를 1군 경기에서 상대해본 선수로 범위를 넓혀도 김주찬, 김태균 단 둘 뿐이며[126] , 당연히도 그들은 모두 고졸이고 대졸선수 중 해태타이거즈를 상대해본 최후의 생존 선수는 박한이. 이제는 해태타이거즈가 사라진 후 태어난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하는 시절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2021년을 기준으로 김태균과 박한이, 김주찬도 모두 은퇴하면서 해태 타이거즈를 1군 무대에서 상대해본 선수들마저도 프로 무대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가 치른 마지막 한국시리즈이자 우승 시즌인 1997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현역 선수는 '''임창용이 유일했으나''' 2018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이 기아에서 방출된 후 결국 은퇴하게 되면서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현역 선수는 이제 없게 되었다.[127]
9. 역대 성적
10. 둘러보기
[1] 창단 당시엔 전라남도 광주시.[2]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으로 전북 연고권 양도[3] 이후 무등 야구장은 KIA 타이거즈가 2013년까지 사용하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옮겨간 후에는 아마 야구장이 되었다.[4] 전북 연고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기 전까지 전북은 해태의 광역 연고지였다. 이 때문에 전주가 홈 경기 분산 개최도시로 선정됐다.[5] 우승 엠블럼은 KIA 타이거즈항목 참조.[6] 80년대, 90년대 18시즌 동안 절반인 9시즌 우승을 차지하였다. 우승확률 50%.[7] 창단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시.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돼 전라남도에서 분리된 것은 1986년이었다.[8] 좁게 보면 1983~1997년의 15시즌동안 9회 우승[9] 출처[10] 1984년에야 광주공장을 세웠으며, 창단 당시엔 서울 용산구에 본사를, 영등포구 양평동과 경기 안양에 공장을 각각 두었다. 더불어 해태제과 창업주 4명 중 하나인 송당 박병규 사장의 고향이 광주광역시이기도 했다.[11] KBO 리그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호헌(전 MBC 야구해설 역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호남 출신 후보 기업군 중에서 프로야구단을 맡을 만한 능력이 되는 대기업은 매우 적었다"고 했을 정도로 호남의 기업 경제 기반은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해 매우 취약한 편에 속했다.[12] 참고로 저 세 기업 모두 스포츠 쪽 보다는 문화예술 분야나 학술 지원 분야에 더 관심이 많은 기업들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과 순수미술 분야 쪽을 꾸준히 지원해왔고, 교보그룹은 창업자 신용호 회장의 호를 딴 대산문학상을 통해 문학계 인재 양성쪽에 큰 공을 들였다.(그리고 2010년대 후반인 현 시점에서는 금융권은 별도 법인을 세워야 하는 프로 스포츠 팀을 보유할 수 없다는 법령 때문에 키움 히어로즈처럼 구단 메인 스폰서를 맡는 정도가 한계다.) 삼양그룹 역시 창업자 김연수 회장의 호를 딴 수당재단을 통해 중고교 장학사업을 전개해왔다. 그나마 삼양사는 휘하에 사이클 실업팀을 두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정말로 금호가 프로야구단을 창단했다면, 그 이전부터 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시점에서 금호그룹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생각하면.[13] 그 박삼구가 맞다.[14] 박인천 회장은 결국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15] 박인천 회장의 장남으로 앞서 언급된 박삼구 회장의 맏형이다.[16] 실제로 박성용 회장은 스포츠보다 클래식 애호가로 더 유명했다. 서울에 있는 금호아트홀에는 박성용 회장의 지정석이 있을 정도. 그러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5월 1일부터 경영악화로 인한 폐관이 결정되었다.[17] 실제로는 금호그룹이 프로 스포츠에 참여하는것을 꺼리는 풍토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금호그룹은 계열사인 금호생명에서 잠깐 여자 농구팀(현 부산 BNK 썸)을 운영한 것을 제외하면 프로스포츠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1988년에 축구계의 요청으로 호남 연고 컨소시엄 구단을 창단하려다가 포기했고 2003년에도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을 창단하려 했으나 광주/전남권의 초강력 반발로 재차 포기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삼성처럼 시스템이 탄탄하지 못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18] 시간이 지나며 프로야구가 시장성과 기업 홍보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검증되고 나서야 이들도 야구판으로 끼어들게 된다.[19] 당시 현대그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해야 된다는 이유로 고사했고, LG그룹은 구자경 회장이 해외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실무진에서 책임질 수 없는 큰 결정을 할 수 없기에 고민만 하다가 결국 MBC 청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때문에 구자경 회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20] 그리고 선경그룹은 스포츠팀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전두환의 반농담으로 인해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유공 코끼리였다.[21] 2000년대 이후로 한국 5대 그룹으로 언급될 정도로 성장한 롯데지만, 1980년대 당시 롯데는 재벌순위 49위였다.[22] 일본도 사실 프로야구 참가 기업들 면면을 보면 재계 일류기업은 아니다. 언론사(요미우리, 주니치), 철도회사(한신, 세이부), 유통기업(라쿠텐), 식품회사(니혼햄, 야쿠르트, 롯데), 인터넷기업(DeNA), 2선급 자동차회사(도요), 금융업체(오릭스) 등등. 그나마 일류기업이라고 할만한게 소프트뱅크 정도. 과거에는 한신을 포함해 고쿠테츠(국철, 야쿠르트 전신), 니시테츠(세이부 전신), 난카이(다이에 - 소프트뱅크 전신), 한큐(오릭스의 전신), 킨테츠(오릭스에 합병) 등 아예 철도회사로 12개팀 중 절반(6개팀)을 채웠고 특히 칸사이권 4개팀(한신, 난카이, 한큐, 긴테츠)은 모두 철도회사 팀이었다. 그래서 일본도 한국과 같이 기업명제로 운영하는것이다. 물론 일본은 다이요가 연고지를 요코하마로 옮기고 이름을 바꾸면서(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지역명 호칭이 점점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23] 삼성 입장에선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삼성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이고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기로 한 타 기업들은 다 삼성과는 비교 자체가 안되는 데였기 때문. 삼성이 아닌 타 대기업들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4] 그렇게 경쟁자들을 비하했던 삼성은 프로야구가 시작되자마자 MBC에게 7:11 대역전패라는 매운맛을 본 걸 기점으로 2001년까지 그렇게 비하했던 팀들에게 매운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장본인은 당연히 해태였다.[25] 박건배 해태 회장과 김동엽 감독은 서울 경복고등학교 선후배였다. 프로야구 창립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감독 한 명 쯤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상징성을 감안하면 호남 야구를 대표하는 인사인 김양중이 감독을 맡는 게 합당했지만 김양중은 이미 일선 지도자에서 물러난지 15년이 지난 상황이었다.[26] 원래는 광주 출신이지만 그가 다니던 동신고 야구부가 해체하면서 신일고로 전학했다.[27] 광주의 또 다른 학교인 진흥고는 1981년이 되어서야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했을 정도로 출발이 늦었다.[28] 참고로 2020년 현재에도 이 기록은 유효함으로 절대 깨지지 못할 기록으로 남겼다.[29] 김성한은 원래 투수 출신으로 대학시절까지 투수를 했으나, 타격에 더 재능이 있어 타자로 완전 전향했다.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김성한은 원년 모든 경기에 출장했으며 26경기란 잠깐이라도 투구를 한 경기를 의미한다.)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즉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라는 것. 1982년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30] 창단은 14명이었지만 뒤에 김일권을 포함에서 몇 명이 더 들어오기는 했다.[31] 1972년 횡금사자기 우승 멤버인 김봉연, 김준환, 김우근을 비롯해 김용남, 김성한, 김종윤, 박전섭, 차정득 등 8명이 군산상고 출신. 광주일고를 나온 강만식, 차영화, 이상윤, 방수원, 광주상고 김종모, 최영조 그리고 1978년 이미 야구부를 해체한 전남고 출신의 신태중[32] 프로야구 출범 당시 KBO에서 선수들의 롤모델로 지정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33] 무등 야구장 1루 덕아웃 옆에 캐치프레이즈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이 항상 걸려 있었다.[34] 요즘처럼 메이저리그 팀의 코칭스태프로 활동하는 것 등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81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지만 여전히 만 40세가 채 되지 않았던 김응용은 미국 조지아 주의 서든 칼리지에 학생으로 입학하는 한편 학교 야구부의 보조 코치를 자청했다. 말하자면 그는 대학야구의 한 구성원이자 조교쯤 되는 위치에서 미국 야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머물다 온 셈이었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선진국 야구를 배우고 돌아왔다는 설명이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경력일 수 있었다.[35] 공교롭게도 당시 MBC 감독은 바로 전해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동엽이었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한껏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이 약 1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터진 보너스 지급문제로 인해 선수단의 결속력이 와해되면서 해태에게 속절없이 깨지고 만다.[36]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위대한 거인의 별을 내세워 삼성을 격파해 우승하였고, 1985년은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번에 당한 것 땜에 빡쳤는지 혼자 다 해먹었다.[37] 패전 처리조로도 출전하였다.[38] 최다 안타는 2014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하였다.[39] 이때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3번째로 꺾었는데, 이로 인해 빙그레는 창단한 뒤 5년 동안 4번 한국시리즈에 올라 3번은 해태에게, 1번은 롯데에게 모두 깨지며 4회 준우승에 머무르는 안습한 행보를 보였다.[40] 126경기 체제에서는 역대 2위이다. 1위는 83승 43패를 기록한 2008년의 SK(.659)[41] 야구통계 사이트 스탯티즈 기준.[42] 당시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치르던 이종범은 규정으로 인해 홈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종범은 광주에서만 출전하면서 63경기에서 16개의 홈런을 쳤다. 그해 홈런왕 김상호가 25개의 홈런을 친 것을 감안하면, 사상 최초로 홈런 - 방위병 출신 도루왕 달성도 불가능한 것 만은 아니었을듯. 방위병 출신 홈런왕은 이미 학교 선배인 김기태(1969)가 이미 전년도에 달성 했었다.[43] 하지만 87년과 89년에 플레이오프에선 이겼다.[44] 95년에도 4위를 했지만 3위와 3경기이상 차이나서 준플레이오프가 없었다.[45]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후 정확히 1주일뒤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부도'''났다.[46] 당시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구단으로 첫우승을 위해서라면 물 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돈으로 승부했다.[47] 저 둘은 이미 하와이 스프링캠프 때 팀의 내분을 '''주도''' 하였으므로 어느정도 김감독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조건을 갖춰주었다.[48] 홍현우는 98시즌 잠시 부진했지만, 95년~97년 3년 내내 골든글러브 및 3할을 유지 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모 성님께서 95년/96년 일시적으로 부진하면서 뭔가 조짐이 이상하기 시작했다.[49] 승패는 같지만 10승 8패로 LG에 우위를 보였기에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광주에서 치루게 되는 것이었다.[50] 숀헤어는 당해년도 타율 0.206 홈런 0개 안타 3개가 전부였다. 그 꼴찌를 한 롯데 자이언츠의 용병인 덕 브래디 보다도 못한 결과였다.[51] 임창용에 앞서 삼성은 위에 서술한 것 처럼 조계현을 이미 4억원에 사갔었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은 이순철, 정회열을 영입했는데 이쪽은 해태에서 방출된 것을 영입한것이다.[52] 그래도 삼성에 있을때는 전천후 투수였다.[53] 역시 마무리투수와 중심타자의 가치 차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마무리투수는 1994, 97년의 이종범급이 아닌 이상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양준혁은 1년간 32홈런, 21도루를 기록하며 괜찮게 활약했지만 곽채진은 임창용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52] , 황두성은 아예 1군에서 10경기도 뛰지 못하고 2000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로 들어가 현대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가 된다.[54] 양준혁이 떠난 이듬해 해태는 이호준을 SK로 보내고 홍현우마저 길고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절반도 안되는 86홈런을 기록한다. 파크팩터상 광주가 잠실보다 홈런이 잘나오는 구장이므로 해태 입장에선 매우 쪽팔린 기록이다[55] 샌더스는 당시 40홈런, 94타점 .247/.408/.575를 기록했다. 타율만 가지면 공갈포지만 이 해 출루율이 타율 2위(.349)의 이병규를 능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101개의 볼넷 뒤에는 133개의 삼진 또한 있었다. 즉 이 선수는 홈런/볼넷/삼진 3개중 하나였던 독특한 선수였다. 그 뒤를 이은 진정한 선수가 등장한다.[56] 보정을 하면 리그에서 더 상대우위를 보인 시즌 여러개에게 밀린다. 그래도 팀 역사상 상위권 타선은 맞다.[57] 한 이닝에 10득점 이상을 기록할 때, 당시 전광판들은 이닝별 점수를 한 자릿수밖에 표시하지 못하는 성능 때문에 9를 넘어서면 10=A, 11=B 등으로 숫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했다.[58] 4년 후에 이승엽이 56홈런을 친 삼성이 깼다.[59] 2000년 현대가 깼다.[60] 그 요인에는 괴물이었던 트레이시 샌더스의 활약이 컸다. 잠실에서만 무려 9개의 홈런을 치며(이승엽이 1999년 잠실에서 4개 2003년 2개를 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론 이승엽이 잠실에서 잘했던 적도 있었다 1998년에는 무려 8개, 2002년에는 7개를 쳤었다. 하지만 샌더스에게는 안됐다.) 진정한 파워히터의 홈런은 구장이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홍현우와 양준혁도 잠실에서 많은 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과는 관계없는 최해식이나 박계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할만큼 이팀은 이해에 홈런에서만큼은 복이 있었다.[61] 그와 반대로 해태의 2연속우승이었던 1996,97년에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잠실에서 단 한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피홈런만 15개를 기록했다. 잠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18경기에서 홈런을 단한개도 치지 못한것 또한 진기록이다. 반면 LG 트윈스상대로는 1997년에만 9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치긴 했다.[62] 이것은 다른 잠실 팀 원정경기까지 합산이다.[63] 개인경력 최다 이닝[64] 근 20년이 흘러 유희관이 6점대 10승 투수가 된다.[65] 최상덕은 이미 1995년도에 부상이 있어서 1997년도 까지 제대로 못 뛰었다가 1998년도 서서히 회복하였다.[66] 그 빈 2루수자리는 '''홍현우'''가 채우게된다.[67] 현재 그 특유의 타입은 두산 베어스가 뒤를 잇는다.[68] 정확히 말하면 원년~2020까지 해서 가장 최악은 2015년, 그 다음이 2000년 해태다.[69] 참고로 1999 시즌부터 2001 시즌은 원조 타고투저 시대였다.[70] 물론 2001 시즌은 삼성-현대-두산 3강체제에 5개팀이 나머지 한 장의 가을잔치 티켓을 놓고 유례없는 전쟁을 치룰 때였다. 2001 시즌의 롯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득점(득점-실점)+, 그것도 48점이나 득점이 실점보다 많음에도 꼴찌를 차지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게 고 김명성 감독의 타계와 함께 8888577이라는 비밀번호로 이어졌다.[71] 2001년 7월 29일 경기는 마지막 홈 경기이고(마지막 홈경기 상대가 삼성이었고, 당시 감독은 해태왕조를 이끌었던 김응용이었다.), 진짜 해태의 고별 경기는 동년 7월 31일 인천 SK 와이번스 전이었지만 우천 순연되었다.[72]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스포츠에 인색한 편이며,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쪽에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한다.[73] 2000년 이전까지 일부 택시기사는 기아자동차, 삼성광주전자를 지역기업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74]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이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이 지난 후다. 2000대 이후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호남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모습.[75] 사실 공식적으로 2군이 있던건 그 이전인데, 2군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김성근이 부임한 1994년부터 이다.[76] 저 셋이 동시에 있던 시절은 1995년 딱 1년 뿐이다. 그마저도 임창용은 당시 주로 2군에 있었고 선동열이 주니치로 떠난 1996년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신 이대진이나 조계현은 같이 뛰어봤으니 성립이 된다.[77] 1993년도 올스타전에서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했으며, 이게 전파까지 타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78] 이 선수는 KIA로 바뀐 이후였는데도 트레이드를 거부한 케이스. 하지만 이 선수가 KIA로 오기 전 해에 감독이 포수를 때리는 사건이 터진 것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처사는 아니었다.[79] 근데, 오히려 이 똥군기를 만든 주범자가 항명사건을 단초하는데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기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80] 다만 이병훈 본인의 말을 보면 이 사건 때문에 이호성과 친해졌다고 한다. 둘 다 같은 1990년에 데뷔를 했다. 이호성은 당해년도 골든글러브 수상, 이병훈은 팀의 첫 우승을 맞보았다.[81] 이 쪽으로 유명한 케이스가 후술하게 될 최훈재다.[82] 삼성 라이온즈에서 넘어왔는데 한국프로야구 출범 후 최초의 트레이드 선수였고 한동안 팀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83] 연고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한화 이글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일본 생활을 접은 뒤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사실 이범호가 타이거즈에 입단한 2010년대에는 똥군기 문화도 예전보다는 없어졌고, 선수들의 프로 의식도 높아진데다가 지역감정 역시 어느 정도 해소된 시기였기 때문에 비교를 할 수는 없다.[84] 원래는 OB 베어스가 충청도 연고팀이던 시절에 뛰었다가 해태로 트레이드 됐다. 물론 애초부터 순순히 해태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85] 1992년 해태의 1차지명 신인이던 박재홍과의 지명권 트레이드로 해태에 입단했다.[86] 여담이지만 박충식은 오히려 인사를 받는 쪽이었다. 당시 그보다 나이 많은 고참선수라고 해 봐야 이호성이나 최해식, 김태룡 정도였으니 [87] 친한 사이인 경우 성만 붙여 X선배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88] 당시 저 셋은 5년차 이상 뛴 선수들이 였다.[89] 최훈재가 이강철, 조계현과 같은 1989년 입단 동기라서 이 둘이 최훈재를 잘 챙겨줬었다. 그러니 후배들이 최훈재를 우습게 볼수 없던 것이다.[90] 1997년에 입단한 좌완투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였다.[91] 다만 2015년 사건은 선수가 아니라 더 윗선에서 내린 지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92] 특히 위에 예시로 언급된 선수 중에 호남 출신이 많은데 그중에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임창용은 해태의 제1연고지인 광주 출신이었다. 그만큼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가는 것이 두려웠던 셈. 그러나 서정환, 최상덕, 장성호, 홍세완, 유동훈처럼 타 지역 출신임에도 해태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는 선수들도 있다. 특히 서정환의 해태 사랑은 남달라서 대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으며 본인 역시 자신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할 정도다.[93] 임창용은 삼성과 일본에서 잘 나갈 때도 "은퇴는 꼭 타이거즈에서 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꼭 했다. 이호준은 SK와 기아가 한창 대립각을 세울 때도 공공연히 "기아가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고, 양팀 사이의 벤클 시에도 아예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NC에서 은퇴 시즌에 광주 원정 경기에서 은퇴는 꼭 타이거즈에서 하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히기까지 했다. 정성훈은 현대 이적 소식이 나오자 떠나기 싫다고 대성통곡 했고, 그 후 올스타전 때 기아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성호는 이적 후에도 경기장에서 타이거즈 팬들을 접할 기회가 생기면 꼭 자기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하고 야구공 같은 걸 선물로 건낼 정도였다.[94] 다만 첫 FA때 KIA가 아닌 원소속팀 삼성과 계약을 했다.[95] 프로 야구팀은 여러 프로 스포츠 중에서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한국의 프로야구팀의 모기업들은 대개 삼성, LG, 롯데, SK, 기아(현대자동차), 두산, 한화, 현대 등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들이다.[96] 지금이야 트레이드가 잉여 전력을 내주고 즉전감이나 유망주를 받아오는 등 각 팀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단, 즉 비지니스 중의 하나로 인식이 변했지만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트레이드 당한 선수는 그 팀에서 거의 토사구팽 당한 꼴이나 다름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동원.[97] 삼성에서 트레이드해서 온 박충식의 증언이다. 해태는 와보니까 재활은 커녕 일개 헬스클럽만도 못한 운동시설만 있었다고. 일례로 웨이트기기에 쇠로 된 추가 아니라 '''돌'''을 매달아 놨었다고 한다.[98] 그리고 최동원이 롯데에서 토사구팽 당하다시피 하며 떠난 계기도 되었다.[99] 사실, 양동통닭 자체는 양이 많고 맛도 나쁘지 않아서 광주광역시 시민에게 인기가 매우 많은 시장 통닭이다. 2015년 11월에는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등장했을 정도로 맛이 좋다. 양동통닭도 좋은 치킨이지만, 안두하가 원했던 파파이스가 아니어서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정말로 치킨 하나 때문에 정황상 해태를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100] 현재 기준으로 약 20만 개. 물론 당시 기준으로 보면 더 팔아야 했을 수도 있다.[101] 체리마루, 호두마루, 피스타치오마루 등[102]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우승확률이 100%라는 해태 타이거즈였지만,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평가를 받은 시즌은 1988, 1991, 1993 시즌 정도 밖에 없다. 1987년, 1996년, 1997년은 오히려 예상을 깬 우승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103] 그리고 KIA로 바뀐뒤에도 KIA에서 뛰다가 FA 취득일수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마찰을 빚다가 SK로 이적했다. 그 결과 호남팬들은 박재홍을 천대시하는 취급을 하게 되었다.[104] 이 때문에 기아에서 올드 유니폼 데이에 매우 소극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기아는 해태의 계승을 외치지만, 동시에 해태색을 지우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결국 2020년 현재는 이 색조합의 올드 유니폼을 출시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팬들의 손을 들어주긴 했다.[105] 그런데 하필이면 유니폼을 제작한 회사가 '''네포스'''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1회용 이벤트로 끝내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106] 나머지 한 팀은 윤석환, 유희관 외에는 제대로 된 왼손투수가 없던 두산 베어스.[107] 이 중 이종범은 왼손잡이다. 하지만 우투우타.[108] 그나마 해태왕조시대 이후 해태말기 ~ 기아시절이 전성기인 선수.[109] 거기에 이 좌완들도 뭔가 하나 모자란 선수들이었다. 김정수만 보더라도 제구력이 워낙 나빠서 김응용이 내가 발로 던져도 너보단 잘할것이라고 까버렸고, 강태원은 성준처럼 구속하나는 느린 좌완이었다.[110] 모기업이 부도로 쓰러지기 1년 전이던 당시 2억 4천만 원은 해태로서는 너무나 큰 투자였다. 실제로 오철민이 받은 계약금은 김진우가 입단하기 전까지 해태 투수 최고액이었다.[111] 오죽했으면 1990년 말 신인드래프트때 인하대 거포 '''김기태'''와, 한양대 좌완에이스 투수 오희주를 두고 고심했다가 좌완투수가 더 급한 사정상 오희주를 지명했다. 그러나 프로데뷔이후 둘의 차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응용감독도 김기태를 못데려온걸 제일 아쉽게 생각한다고. 만약 김기태가 해태유니폼을 입었다면 해태 전성기는 더욱 더 연장될수도 있었을 것이다.[112] 이상하게도 이 선수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자마자 모두 폭망했다. 특유의 팀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다거나 그 외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듯 하다.[113] 한국에서 제일 많은 성씨가 김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니까.[114] 장성호, 양준혁, 트레이시 샌더스, 장일현도 경우에 따라 선발했다.[115] 사실 최희섭은 1998년에 이미 1차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만일 예정대로 1998년에 그가 MLB에 가지않고 해태에 입단했더라면 그 해 해태가 4강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구에 만약은 없다. 그리고 이용규와 김원섭은 모두 트레이드로 넘어 온 선수들이다.[116] 후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한 김응용은 류현진 때문에 한화 감독직을 수락했다면서 류현진을 메이저리그로 보내기 싫었다고 집착했다.[117] 해태 시절에 좌완에 한이 맺힌 김응용 전 감독은 현역시절에 좋아하던 유형의 투수는 류현진과 같은 덩치좋은 좌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다보니 삼성 감독이 되고서 해태 시절에 아끼던 강영식을 데려가기도 했었고....[118] 이 선수 시즌 초만 되면 날아다니고 중반부터 서서히 알아서 기울어지는 전형적인 DTD 선수[119] 동봉철과 송유석은 1996년 11월 5일, LG의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 상황이었다. 트레이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다음날에 최훈재와 최향남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120] KBO 초대 사무차장이던 이호헌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정부가 흰색 소복을 입은 수천 명의 시민들이 야구장으로 몰려와 소요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언급하면서 경기 장소를 옮기라고 압박했다"고 한다.[121] 여담이지만, 이러한 정부 당국자들의 우려는 몇 해가 지나서 결국 현실화되기는 했다. 물론 광주가 아닌 마산에서. 정확히 얘기하자면 1987년 6월 10일 당일 마산에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한국 A팀 대 이집트 팀간의 경기가 펼쳐지던 도중에 최루가스가 경기장 내부로 들어와 이집트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고 결국 몰수 게임이 선언되었는데, 강제로 자기 돈을 내고 경기장에 왔음에도 환불이 되지 않자 관중들이 넥타이 부대로서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즉,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8년이 지난 후의 얘기이다.[122] 당시 서종철 총재의 설득이 정부에 먹혔던 것은 서 총재의 권세 덕에 가능했다. 서 총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선배였고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군 시절 상관이었다.(서 총재가 장군이던 시절 부관으로 일하던 장교가 전두환과 노태우) 게다가 제4공화국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했던 인물이었기에 야구판과 당시 정부에서 그의 권세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많지 않았다.[123] 다만 1985년 5월 16일에는 해태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가 광주에서 열린 적이 있다. 아마도 이 때가 평일이었기에 별 영향이 없다고 판단하고 경기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해태가 이겼다.[124] 같은 호남지역이지만 전북지역은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5.18 당시 광주 봉쇄 작전이 진행될 때도 신군부는 광주와 목포로 가는 철도와 도로의 통행을 전북의 최남단 지역인 정읍시까지만 허용했다. 그 정도로 전북지역 내부에서는 통행이 자유로웠다. 이 때문에 이 시기 홈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한 주 내내 타 지역 원정을 다녀온 후라든가...)에서는 광주가 아닌 전주에서 홈 경기를 치러야 했다.[125] 임창용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논란에 휘말려 삼성에서 퇴단 조치된 후 기아가 영입했고 정성훈은 양상문 LG 단장이 주도한 선수단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돼 방출 조치된 후 기아가 받아줬다.[126] 이대호, 이성우, 김강민, 권오준은 프로입단은 해태가 생존하던 시절에 했으나 1군에 올라온건 해태가 KIA로 바뀐 후였다.[127] 2015년 시즌 종료 후 임창용이 삼성에서 퇴단한 후 이호준이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임창용이 복귀하면서 두 명으로 늘게 됐다. 그리고 이호준이 2017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면서 임창용이 1997년 V9 달성 당시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 됐다.[128]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129]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130]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131]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132]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후기리그에서 실제로는 33승2무19패로 공동1위였으나 1위결정전에서 OB에게 패했다. 82~85시즌의 제도였다면 죽을 힘을 써서라도 1위에 도전했겠지만 제도가 바뀌어서 어차피 한국시리즈 직행하는데 별 의미 없는 경기였기도 했고[133]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134]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135] 한화와 승-패-무가 완전히 같은 공동 3위. 2017시즌 현재의 계산법이라면 해태가 11승7패로 팀간전적이 우위인데다 한화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3위였겠지만 당시는 준플레이오프 승자팀에게 3위를 주기로 했기 때문에 한화가 3위, 해태가 4위가 된다.[136]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이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5년의 해태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한 유일한 팀이었다. 그런데 22년 후 LG가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고도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면서 2번째로 불명예 기록을 세운 팀이 됐다.[137] 드림리그 4위/4팀[138] 드림리그 4위/4팀